세종이 실시한 국내 최초의 여론조사
정치권에서 민감한 사항을 결정할 때 가장 많이 활용하는 것이 여론조사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다수결의 원칙이니 여론조사야 말로 본인의 주장을 확실히하는 근거가 되며, 반대이론을 잠재우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1430년 세종대왕은 세계 최초라 할 수 있는 전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정부, 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 각 품관과, 각 도의 감사, 수령 및 품관 으로부터 여염의 세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전국민 여론조사를 하기 위해 걸린시간은 약 4개월, 17만명에게 여론조사를 하였고, 객관식으로 여론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름을 묻고 찬성이유와 반대이유까지 상세히 조사한다.
세종대왕은 왕이라는 위치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론조사라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세종대왕이 하고자 했던 것은 세제개혁이었다.
기존에는 손실답험법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논밭에 대한 세금을 거둘 때 그 해에 곡식이 얼마나 산출되었는가를 보고 세율을 정하는 것으로 흉년이면 조금 거두고, 풍년에는 많이 거두는 제도였다. 제도의 의도는 좋으나 흉년과 풍년을 가르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다. 땅을 소유한 지주들이 조사관에게 뇌물을 바쳐 수확량을 축소해 보고하는 것이 관행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세종대왕은 이를 타파하고자 공법을 실시하고자 했다. 공법은 정액세제를 의미한다.
즉 흉작이던 풍작이던 소유땅의 크기에 따라 동일한 세금을 내는 것이다. 일견 불합리해 보이지만 워낙 탈세가 많았기 때문에 아주 적은 정액세제를 부과하더라도 제대로만 걷히면 지금보다 나아지리라는 세종대왕의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 조정 대신들은 기본적으로 대지주였다. 조세투명성을 높이는 제도이기 때문에 찬성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청렴한 정승으로 유명한 황희정승조차 반대하는 제도였던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이를 여론조사 결과로 돌파하려했고, 세계 최초로 전국민 여론조사가 실시된 것이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17만명에게 4개월에 걸쳐 조사한 결과 찬성이 9만8천6백57인, 반대가 7만4천1백49명이었다. 찬성이 높긴 했지만 반대도 비등했던 것이었다. 결국 세종대왕은 공법 적용을 늦추고 조정 대신들과 협상을 벌인다. 공법 시행을 주장한지 17년이 지나고 조정 대신들과의 협상을 마쳐 공법이 시행된다. 물론 최초의 개혁안에서는 많이 후퇴된 형태였기 때문에 조선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여론조사는 두가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세종대왕이 신하들과의 대립에서 백성의 의견을 근거로 삼으려 한 점.
둘째, 분명히 다수가 동조하는 의견이었지만 반대가 많았다는 이유로 무려 17년간이나 신하들과 제도에 대해
협상을 벌인 점이다.
물론 이 때문에 제도가 후퇴되었지만 그 과정은 현대 정치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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