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은 과연 힘이 없어 망했는가?
한국 민족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그놈의 지랄맞은 "약소국 컴플렉스"다. 우리는 약해, 우리는 약해, 우리는 약해... 그러니까 강해져야 해,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져야 해,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상관없고 어떤 희생도 무릅써야 하고... 황우석 사태도, 디워 사태도, 지난 두 번의 대선도 결국 그러한 컴플렉스에서 비롯된 바 컸다.
결국 뭐냐면, "대한제국은 힘이 없어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고 36년의 식민지 치하를 겼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약소국이라 망했으니 망하지 않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인데... 민족주의를 자처하는 파시스트들이 항상 쓰는 논리다.
"힘이 없어 당했으니 힘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는 받아야 할 임금과 누려야 할 대우를 포기해야 하고, 당연히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념이야 어찌되었든 강제로 군대에 가서 무기를 들어야 하고, 심지어 여성들은 자신의 자궁을 나라를 위해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도 카미카제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것이 한국인들이다.
"왜 우리는 저런 게 없을까?"
"저런 걸 본받아야 한다."
"우리도 저렇게 해야 한다."
이 블로그에서도 예전에 카미카제에 대해 포스팅했을 때 그런 리플들이 적잖이 달렸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을 비웃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나? 정말 병이라 해도 좋을 텐데,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대한제국은 그렇게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개항을 할 당시에도 사실 일본과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될 당시 대한제국의 군대가 보유하고 있던 병력이나 무기들은 그렇게 한 번 저항조차 못해 볼 정도로 형편없지도 않았다. 심지어 당시 대한제국에는 일본군이 보유하지 못한 마우저 소총이나 크루프 속사포 같은 최신무기마저 다수 장비되어 있었으니.
물론 정면으로 맞부딪힌다면야 당시 대한제국의 전력으로 일본과 전쟁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까지 동아시아 최대, 최강의 제국이었던 청과도 싸워 승리하고, 세계최강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던 러시아와도 비록 극동에서의 제한전이기는 했지만 사실상의 승리를 이끌어냈던 일본군이었다. 2만 2천 명 규모의 대한제국 군대로 30만에 이르는 일본군을 상대해 이긴다는 것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이상의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도 일본이 러시아보다 더 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러일전쟁이라고 하지만 러시아가 동원한 전력은 극동의, 러시아가 보유한 전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은 보유한 모든 가용한 전력과 자원을 러일전쟁에 투입하고도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는 여전히 러시아 본토에 만주에서 잃은 그 이상의 전력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끝내 손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결국 멀리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만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데 따른 부담이었다. 역시 발틱함대가 대한해협에서 일본 함대에 괴멸당한 것도 희망봉을 멀리 돌아 항해하느라 지치고 소모된 끝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 함대에 포착되어 불리한 상황에서 교전을 강요당한 결과였고.
다시 말해 대한제국이 그럴 의지만 있었다면 지리적 이점을 무기로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서의 소모전에 빠져들도록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일본을 지리한 소모전에 빠져들도록 할 수 있다면 아직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상당히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일본으로 하여금 유리한 조건에서 협상에 응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대한제국이 그럴 의지만 있었다면 대한제국을 도울 나라들도 적지 않았다. 일단 영국은 이미 이전에 미국에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었고, 미국 역시 시어도어 루즈벨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도저히 일본에 반대하여 조선인들을 위해 개입할 수가 없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주먹 한 방도 날릴 수가 없었다."
개입할 빌미만 있다면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조선의 문제에 개입할 의사가 있었다. 원래 미국이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는 것을 용인키로 한 것도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보면, 굳이 일본이 아니어도 좋았고, 괜히 일본을 키워 태평양에서 경쟁자를 하나 더 늘리느니 만만한 조선에 그 역할을 대신 맡겨도 좋았다. 스스로 그럴 의지가 있었고, 그 의지만 내보일 수 있었다면 말이다.
하긴 1876년 불평등 조약을 맺고 강제로 개항을 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조선과 일본의 차이가 그렇게 컸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직 일본의 산업은 취약했고, 군사력도 압도적이라 할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일본의 상인들이 조선의 경제를 교란시킨 주력상품이 영국으로부터 수입한 옥양목이었고 보면, 단지 먼저 개항하여 유럽의 제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고 일본이 조선을 압도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물론 청이라고 하는 존재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큰 걸림돌이었다. 미국 등과의 조약에 있어서도 청은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사실상 조선을 속국처럼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이미 나라의 문은 열려 있었고 서구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텐진조약 이후 청과 일본이 동시에 조선에서 철군한 뒤로는 자주적으로 나라를 개혁할 짧지만 소중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조선은 어떠했던가? 과연 일본과 같이 과감하게 내정을 개혁하고 문물을 일신하는 각오가 되어 있었던가?
아마 당시 지배층의 정신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독립협회였을 것이다. 원래 독립협회는 황제인 고종과 당시 대한제국의 관료들이 개화파 지식인들과 손을 잡고 외세에 대항하여 국권을 지키고자 만든 단체였다. 민비가 살해당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도망가 있던 상황에서 외국의 간섭이 극대화되고 조선의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민간의 운동을 통해 국권 - 정확히는 고종의 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활동은 조정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비판과 입헌군주제로까지 확장되고 있었고, 결국 자신의 권력강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겨지자 고종은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로 하여금 그들에게 테러를 가하도록 사주하기에 이르고 있었다.
하기는 나라의 국운이 흔들리는 와중에 나라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들여 자기 생일잔치를 열었던 고종이다. 심지어 왕이랍시고 벼슬 팔아 그 돈으로 황제의 개인금고인 내탕금을 채우고 있었으니, 그러한 내탕금에는 광산과 철도와 삼림 등의 조선의 자원들을 열강에 헐값에 넘긴 댓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 일부는 은행을 세우는 등 나름대로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쓰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대부분은 여전히 고종의 손에 남아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목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즉 전근대적인 전제군주였던 고종에게 있어 조선은 곧 왕이고 왕이 곧 조선이었고, 따라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모든 것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러시아와 일본 등의 열강의 제국주의 침탈을 잠시나마 저지하는 중대한 역할을 했던 만민공동회 등의 자발적인 민중의 움직임이나 요구는 외면한 채 오로지 왕실의 안위만을 위해 열강들과 거래하고 타협하고 양보하며 조선의 잠재력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없잖아 있기는 하다. 일본이야 메이지 천황이나 삿쵸 등의 웅번들이나 결국 바쿠후 체제에서 변두리의 비주류에 불과했었다. 따라서 그들이 주류로 올아서기 위해서는 기존의 막번체제를 해체할 필요가 있었고, 그를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근대화였던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당시 고종에게는 아버지 대원군이 남겨놓은 강력한 왕권이 남아 있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근대화니 개화니 하는 것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요소일 뿐, 그래서 자기 주머닛돈으로 은행도 설립하고, 학교도 짓고 할 수는 있어도, 개화파의 지식인이나 민중이 자신의 경쟁자로 나서는 것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1904년부터 항일의병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들 의병에 대해 폭도로 규정하고 일본군으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요청한 것도 바로 이들 고종과 조정의 관료들이었다. 차라리 나라야 뺏길지언정 무지렁이 백성들이 자신의 권위를 넘보는 것은 용납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일본의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 두둔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외국의 군대로 하여금 나라의 국권을 지키겠다 나선 의병을 토벌토록 한 것에는 - 그것도 폭도라 규정한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만일 당시 고종이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에 대항하도록 명령했고, 그래서 일본에 비해 한참 부족하기는 하지만 대한제국의 군대와 의병이 합세하여 일본에 저항하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전력에서는 열세일지 몰라도 바다 건너 원정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일본군으로 하여금 조선에서 소모전을 강요당하도록 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극동에서의 또다른 이익을 구하는 다른 열강을 자극할 수 있었다면? 물론 가정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지만 구한말의 역사가 그리 썰렁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가 나라가 망한다는데 정부는 하는 것 없고 민간의 의병만이 저항의 전부였다니.
다시 말해 당시 조선 - 대한제국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단순히 힘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먼저 지배계급 자신이 전략도 없었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민중의 자발적인 의지를 오히려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나라의 힘을 결집시켜야 할 때 자신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해 오는 민중들에 대해 오히려 적개심을 품고 있었고, 그 결과 차라리 나라를 빼앗길지언정 그들과 함께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왕인 고종조차도 그랬다. 작은 양보 하나 하기조차 두려워하고 오로지 왕위만을 챙기려 한 결과 조선은 힘을 결집하여 저항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조차 잃었던 것이다.
실제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사실상 일본에 병탄되어 사라진 뒤로도, 그토록 멍청하고 탐욕스러웠던 고종에 대해서조차 조선의 민중들은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다. 왕이었고 황제였기에, 그들의 군주였기에, 군주란 곧 나라였기에, 여전히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역량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니...
그렇다고 조선의 민중들이 아주 반동적이기만 해서 근대화를 반대하기만 했다면 모를까, 만민공동회에서 보듯 이미 근대적인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이 있었고, 이후 3000개가 넘는 학교가 세워진 데서 보듯 근대화에 대한 인식도 있었다. 다만 기득권을 지키는 데 골몰하느라 그를 외면하고 있을 뿐. 모든 것은 그럴 의지도 있고, 그럴 힘도 있었음에도, 그 의지와 힘을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제대로 살리지 못한,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의지만을 갖고 있던 지배층의 탓이었다. 고종의 탓이었다.
역사상 힘이 없어서 나라가 망한 예는 오히려 극히 드물다. 대개는 힘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내적인 역량을 제대로 결집하지 못한 탓이 컸다. 그럴 의지도 있고, 그럴 힘도 있는데, 그럴 의지와 그럴 힘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다. 알량한 기득권이 그것을 놓기보다는 차라리 망하기를 선택한 때문이었다. 바로 대한제국처럼.
힘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다. 지킬 의지가 없으니 망하는 거다. 지킬 가치가 없으니 망하는 거다.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이들조차 제대로 결집시키지 못하니 망하는 거다. 힘이 없어 망한다? 힘을 추구하느라 그 강대한 힘에 치여 망하는 경우가 그런 예다. 오로지 힘에만 집착하느라 작은 부분을 보지 못한 끝에 그 작은 부분으로 망하는 것이다.
힘을 모으자? 뜻을 모으자? 역량을 결집하자? 누구를 위해서? 누구에 의해서? 왜? 어떻게? 고종이 하자는대로 조선의 인민들이 그대로 따랐다면 조선은 살아남았을까? 그저 고종이 하자는대로 뜻을 모으고 힘을 모았다면 조선은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그래서 군사력만 일본을 넘어섰다면 조선은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행여나!
한국의 민족주의가 위험한 이유다. 결국에는 그렇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힘의 결집을 강요하고 있으니. 고종이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국가와 민족이라는 기존의 권위와 권력만을 위해 자발적인 모든 의지를 희생하고자 하고 있으니. 왜곡된 역사관이란 이래서 어처구니가 없다. 힘이 약해서? 오로지 힘이 약해서만? 그 이전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다.
덧)뭔가 쓰다가 엇길로 샌 것 같기는 하지만... 뭐 글쓰기 싫어 죽겠는데 의무방어전으로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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