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해전의 비밀
난중일기에 이순신 장군은 1597년 정유년 9월 16일의 일기에 그날의 긴박한 접전의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군사들이 모두 사색이 되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 볼뿐...나머지 배들도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했다 ...'
1597년 9월 7일. 어란진 앞바다에 333척의 전함과 보급선과 연락선 등 총 500여척의 대선단이 집결한다. 이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333척의 일본 대선단은 1597년 9월 16일 이른 아침 어란진을 출항한다. 일본 전투 선단의 목적지는 조선 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우수영. 지금의 진도 대교가 가로 놓인 울돌목을 통과하는 것이다.
같은 시간 우수영의 조선 수군 기지. 일본 대선단이 어란진을 출항 했다는 정찰병의 보고가 들어 온다. 조선 수군 전력의 전부인 13척의 함대는 333척의 일본 대선단을 맞아 싸우기 위해 우수영을 떠나 조용히 명량 해협으로 나아간다. 돌격해 오는 일본 대전단을 맞아 13척의 조선 수군 전함은 울돌목에 일렬로 포진한다. 조선 전함 13척 중 이순신 전함이 먼저 앞으로 나가 적선과 맞섰다. 명량해전 그 막은 이렇게 올랐다.
그러나 이 전투는 불과 2시간만에 막을 내린다. 명량해전에서의 우리측 피해 상황은 놀랍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전함의 피해 상황이 기록돼 있다.
전사자가 2명, 부상은 3명 - 사상자는 모두 합해서 5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순신이 사상자의 이름,부상의 정도까지 직접 기록할 만큼 우리측 피해는 적었다는 것이다. 남은 13척 전 전함에다 추정을 해 보면 전사 30 여명 부상 40여명 무두 합해 70명 많이 잡아서 100명 미만의 전사자가 났던 걸로 추산이 된다. 그에 비해서 일본 수군은 그 피해가 어마어마 하다. 각종 기록을 종합해서 추정한 명량해전에서의 일본측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불타고 부서져서 격침된 배는 31척, 90여척이 심한 파손을 입고 달아 났다. 격침된 배의 사망자는 최소 3천 5백여명으로 추산, 도주한 배에서의 사상자는 얼마나 될까? 거기에 따른 일본 수군의 병력 피해가 구체적으로 기록으로는 전하고 있지 않고 있으나 원래 중선급 수군의 전함 정원은 100명이다. 추산을 해보면 일본 수군 9천명이 그 배에 탔었는데 조선군 포격에 맞아서 혹은 화살에 맞아서 절반 정도 약 사천오백명이 전사하거나 바다에 빠져 익사한게 아니냐 그렇게 추정이 된다. 모두 일본군 피해는 최소한 팔천여명으로 추산이 된다" 조선 수군의 전함은 단 한척의 피해도 없었다. 13척대 333척의 불가능한 전쟁, 그것을 승리로 이끈 신화적인 전쟁이 바로 명량 해전인 것이다. 물론 명량 해전 전에는 우리 조선 수군의 전함도 300여척이 넘었다. 그러나 명량 해전 바로 직전에 오직 13척만이 남게 된다. 그 많던 전함이 도대체 어디 가고 천하의 명장 이순신에게 어떻게 겨우 13척의 배밖에 남지 않은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일본의 정한위략책 정한 위략 - 총 다섯권으로 묶여져 있는 이 책은 임진 왜란 7년을 연구 하는 귀한 사료가 되고 있다. 여기에 칠천도 - 지금의 거제도 앞바다 에서 벌어진,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의 대참패에 대한 기록 있다.
'일본 장수 시즈마 160여척 격파, 도도 60여척, 야스하루 16척, 목을 벤 수만도 수천명에 이른다'
'익해자 불가지 -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거제도 앞바다의 좁은 포구에 정박 중이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자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간다. 이때 육지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일본 육군에게 원균을 비롯한 수 많은 조선 수군은 죽임을 당해 전멸하고 만다. 이 전투로 일본이 제해권을 가지게 되었다는점에서 의미가 크다. 일본군이 해상권을 획득했다는 것은 보급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육군과 수군이 상호 협력해서 서울까지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바로 그점이 이 전투의 가장 큰 의의라고 할 수있다. 그동안 조선 수군에게 차단돼 있던 한반도의 서해 진출의 길은 일본의 승리로 뚫리게 된것이다. 일본이 전라도는 물론 충청도를 뚫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조선 조정은 아무 대책 없이, 그저 무능하게 혼란에 빠져 허둥대고 있을 뿐이었다.
충무공 전서-여기에 이순신에게 부산포로 진격하라고 강요하 는 조정의 명령문이 있다.
"가토가 대군을 이끌고 온다고 하니 수군은 부산포로 진격해서 적의 수군을 무찌르도록 하라"
이순신 장군도 바로 이 칠천량 해전이 있기 전에 원균과 똑같이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조정의 무모한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조정의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어떻게 했을까?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군의 속임수를 두려워하여 출격나온다 하지 않았다. 권율은 이순신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죄를 주어 조정에 보고 했다. 그 유명한 이순신의 백의 종군이 바로 부산 진격을 둘러싼 수군과 조정간의 알력으로 말미암은 사건인 것이다.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은 수군에서 쫓겨 나 있었던 것이다.
권율 휘하에서 백의 종군하던 이순신은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는 비보를 듣고 다시 수군을 수습하기 위해 정찰을 돌던 중 진주 운계리 마을 손경례라는 사람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된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조정에서 내려 보낸 한 장의 교지를 받게된다. 백의 종군 상태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다시 재임명한다는 것이다. 원균의 패배로 허둥대던 조정이 찾은 방책인 것이다.
'지난날 그대를 백의 종군케 해서 오늘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었으니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 주기 바란다'
교서는 그야말로 조정의 솔직한 사과문 이기도 했다.
교서를 받은 그날밤 이순신은 바로 길을 떠난다. 칠천량 해전에서 겨우 남은 전선을 수습하고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한 강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주춧돌의 흔적만 남아 있는 조양창터 -이순신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은 도망가고 창고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이름만 수군 총사령관이지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버리고 간 곡식을 줍다시피 모으고 다녀야만 했던 형편이었다. 하물며 무기의 보급이야 말할 나위가 없었다. 보성 군청의 군기 창고 역시 다행히 버리고 간 무기가 남아 있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무기를 수습한다.
조양에서 양곡을 얻고 보성군 관아에서 병기를 검열해 4마리의 말에 싣고 수군 120여명을 확보해서 바로 명량 대첩을 이룰 수 있는 그러한 기반을 여기서 닦으셨던 곳이다. 수군의 기반이라고는 하나 불과 4마리의 말에 실은 분량의 무기와 120명의 군사,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미약하지만 해전을 치를 준비를 해 가고 있던 이순신은 추석날 저녁 뜻밖의 어명을 받는다. 군사를 합쳐 육전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이 때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산도가라는 새로운 설이 있다. 정유년 중추라고 돼 있는데, 이날은 이순신이 조정으로부터 조선 수군 철폐 명령을 받던 날이다. 이때 한산도가를 읆었다는 것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 어루만지며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다시 시름을 더하네"
수군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가를 읊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수군 철폐를 반대하는 비장한 결의가 담긴 장계를 올린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지한다면 이는 적이 바라는 바로서 적은 호남을 거쳐 쉽게 한강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신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장계로 조선 수군의 명맥은 유지 될 수 있게 된다.
1597년 8월 18일. 이순신은 장흥 회령포에 도착한다. 이 포구에서 이순신은 남은 12척의 배와 새로 합류한 배 한척 - 모두 13척으로 조선 수군을 새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문제는 땅에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 결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은 군사들을 모아 놓고 최후의 결의를 밝힌다.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 위한 한 목숨이 무엇이 아까우랴.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13척의 남은 배로 초라하지만 비장하게 조선 수군은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다.
안택선 -임진왜란때의 사용됐던 일본의 주력 함선이다. 길이가 30여미터인 안택선은 다른 배와 달리 갑판위에 가옥이 안치돼 있다.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안택선 -이 배는 2층 구조로 전투원은 위의 갑판에 노꾼은 아래 갑판에 각각 배치됐다. 뱃 앞머리가 뽀죡한 것이 특징이다. 노는 90여개, 여기에 노군은 120명 여명이 필요했다. 갑판에서 전투를 벌이는 전투원은 약 200여명, 안택선에는 300여명이 승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주력선인 안택선에 맞서는 조선의 판옥선은 어떤 배일까? 판옥선의 크기는 30여 미터, 배 앞머리가 둥글어 거친 바다를 항해하기 쉽게 만들었다는 게 특징이다. 갑판은 역시 2층 구조로 노꾼과 전투원을 따로 배치 했다. 300여명 가까이 승선할 수 있는 이 판옥선은 겉으로는 안택선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배를 만드는 방식에서는 굉장한 차이가 난다.
판자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배의 견고성은 결정된다.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나무못으로 연결한다는 것이다. 판자의 아래부분을 ㄴ 자로 턱을 깎아내고, 그 위에 판자를 붙인 다음 참나무 못을 윗판자에서 아래 판자로 내려 꽂듯이 박는다. 반면 안택선은 쇠못을 박아 판자를 연결시킨다. 판자 2개를 그대로 나란히 붙이고 못은 쇠못으로 판자와 판자 2개를 똑바로 박아 연결한다. 두꺼운 판자를 이어 붙여 바닥을 만들고 반듯하게 깎은 판자 이어서 옆면을 세운다. 갑판은 2층 구조지만 옆으로부터의 충격이 약한 구조다. 돛대는 하나 이것이 일본의 안택선이다.
조선의 판옥선은 두껍고 네모난 판자를 이어서 평평한 바닥을 만들고 7개의 판자로 배를 세운다. 배가 옆으로 찌그러지지 않게 장쇠로 골격을 단단히 한다. 2층 갑판에 가옥이 하나 - 2개의 돛대를 단 모습이다.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은 일본의 안택선에 해당한다. 그러나 안택선은 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판옥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이것은 조선과 일본 수군의 전력차로 연결된다.
조선 수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또 있다. 조선 수군들이 사용한 무기이다. 일봉의 조총의 엄청난 위력으로 조선 육군은 커다란 피해를 입고 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달랐다. 왜냐하면 조선 수군에게는 조총을 무색케 하고 일본 수군을 떨게 했던 무기가 있었다. 조선 수군의 가장 큰 특징은 함포에 있다. 배에 포를 장착하고 다니면서 사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수전의 양상이 이미 근대적 해전의 단계로 들어섰음을 뜻한다. 조선 수군이 사용한 가장 대표적인 함포는 천자총통 - 길이가 130㎝로 포 가운데 가장 크다. 구경은 15㎝며 무게는 298㎏이나 된다. 23 한번 발사하는데 사용되는 화약은 1.1㎏이다. 무게 30㎏의 대장군전을 400여미터 가량 날려 보낼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지자 총통의 탄환 종류가 2가지가 있다. 나무 화살 대신에 작은 탄환을 수십정, 수백발을 놓고 쏘는데 그것을 조란환이라고 했다. 적의 인명을 살상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것이 한번 터지게 되면은 적선 위에 있는 많은 인원들이 순식간에 부상, 사망을 많이 하게 되는 거 였다. 조란환을 이용한 총통의 위력의 큰 효과를 봤던 겄이다. 한꺼번에 발사되는 탄환의 양은 300발 -엄청난 살상력을 발휘했던 조란환은 일본 수군에게는 가장 무서운 무기였다
일본은 대포를 만들 수가 없어서 서양에서 수입해서 썼다. 자체적으로 대포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임란이 끝난 뒤 에도 시대에 들어서이다. 설사 대포를 서양에서 들여온 대포를 사용한다고 해도 일본 수군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일본 수군은 배의 들보에다 포를 메달아 놓고 써야만 했다. 대포를 배에 싣기 위해서는 선체가 매우 튼튼해야 하는데 일본의 전선은 도저히 그럴만한 배가 못되었다 그것이 대포를 활용하지 못한 이유이다.
아무리 우수한 배, 우수한 무기라도, 13 대 333은 감당하기 힘든 전력의 차이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있었을 것이다. 흔히들 명량 즉 울돌목의 엄청난 조류를 그 무기라고 한다.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이 울돌목, 물살이 빨라 요즘도 웬만한 배는 물살을 거슬러서 올라 가지 못한다.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이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 나가게 된다.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급조류가 흐르는 것이다. 그리고 울돌목에는 수십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다.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 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명량해전에서 충무공과 함께 싸웠던 김억추 장군을 기리는 이곳 사당에 오래된 책 한권이 전해지고 있다. 명량 해전때 전라 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 -여기에 '철쇄'라는 기록이 보인다. 양쪽에 막게를 박아 놓고 쇠줄은 물 아래에 잠기게 숨겨 놓고 일본 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종합 해보면 다음과 같다. 어란진에서 출발한 333척의 일본 대선단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거침없이 몰려오던 일본 전선들은 생각지도 않은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혀 여지없이 깨진다. 오후 1시경 물길이 정지한다. 그러나 일본 수군들은 좁은 수로에 갖혀 오도가도 못한채 혼란에 빠져 있다. 이때 조선 수군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같이 쏘면서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됐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일본 수군쪽으로 빠르게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해지자 일본 수군은 극도로 사기가 떨어진다. 조선 함선은 떠내려 가는 일본 수군을 화포를 쏘며 추격해, 완전 섬멸해 버린다. 쇠사슬과 울돌목의 물길을 이용한 이 작전으로 일본 수군은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전멸하고 조선 수군은 단한척의 피해도 없이 대승를 거둔다...
한순간 빼앗겼던 조선의 재해권을 되찾게 한 값진 전투. 이것이 바로 명량해전 그 빛나는 승리였다. 막강한 화력의 뛰어난 전투력을 갖춘 판옥선 -그리고 급조류의 좁은 수로인 명량 해협 -좁은 수로에다 물살이 강한 울돌목을 활용하는 방법 -이런 요소 들을 잘 활용할 줄 알았던 뛰어난 이순신장군의 전략 전술이 있었기에 명량 해전은 이길 수밖에 없는 그런 전쟁이었던 것이다.
1905년 러시아의 함대를 궤멸시켰던 일본의 영웅 도고제독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를 영국의 넬순 제독과는 비교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는 견줄 수가 없습니다. 이 도고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순신 장군은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일본인들에게는 전쟁의 신으로 숭상 받았던 세계적인 해군 제독 도고가 했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