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김소위 묘소
묘역번호 : 54묘역 1659
故 陸軍 中尉 金壽泳의 墓 一九九十年 十一月 十八日
一九五0年 八月二七日慶北安康 地區 禱陰山戰鬪에서 戰死 一九六年五月二九日國立墓地 에安葬하다
一九九0年顯忠日 豫備役陸軍准將 黃圭萬 霽山書
<김소위와 황규만소위의 사연>
1963년 4월에 황규만 당시 대령은 OO 소재 제1군사령부 비서실장으로 보직되었다. 그때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안강-기계 북방의 어느 고지에 임시 매장하였던 김소위의 시신을 찾을 기회가 왔다는 것이었다.
전쟁 휴전 이후로 항상 생각은 가득했지만, 전후방을 오가며 틈이 없던 군생활, 그리고 짚차 한 대 배정되지 않은 보직 등으로 그럴 겨를이 없으셨던 듯 하다. 제1군사령관 비서실장이 되자 비서실 통제하에 있던 L-19 연락기, 차량 등이 가용하게 되어 마침내 실행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해 2월초부터 포항, 안강, 기계 지구에 대한 자료를 챙기고 지도를 보며 당시의 전투 상황에 대한 도상(圖上) 정찰을 했으며, 5월 7일을 결행일(D-Day)로 하여 참모장의 허락을 득한 후 OO 비행장에서 L-19 비행기를 타고 그 지역으로 날라갔다.
이 즈음에서 6.25 당시의 회상 장면으로 넘어간다.
전쟁 초기에는 부대 편제가 거의 무너지고 재편성 되는 일이 잦았다. 1950년 8월 27일 당시에 황규만 장군은 소위 계급이었는데, 아침 8시경에 연락병이 말하길,
"소대장님, 어떤 부대가 저 아래 골짜기에서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어유. 좀 보셔유."
라고 하여, 유심히 내려보니 선두에 소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을 필두로 한 무리의 아군이 올라오고 있었다. 황소위는 그 인솔자에게 물었다.
"수고하십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1연대에서 왔습니다. 당신네 부대가 공격을 못 하고 있으니 지원을 해 주라는 임무를 받고 왔습니다."
"난, 황소위라고 하는데, 당신 이름은 무엇입니까?"
"김소위라고 합니다. 갑종 1기 출신입니다."
약간의 이북 출신 말투에, 당시 20세이던 황소위 자신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장교는 모두 태릉 육사에서만 배출되는줄 알았는데, 갑종 1기라고 하는 말에 잠시 고개를 가우뚱 하기도 했다. 전쟁 초반이라 모든 것이 어수선하던 때였다.
"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그 소위가 물어오자,
"저 높은 고지와 저 옆으로 뻗은 능선 일대에 있습니다."
황규만 소위도 이곳에 배치된 지 3-4일밖에 되지 않아 확실한 적의 위치를 알지 못했다. 그저 중대장이 소대원을 데리고 어디로 가라고 해서 위치한 것일 뿐.
김소위는 황소위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후에, 직접 지형정찰을 해야겠다며 포복으로 10m 가량 능선을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켰는데, 순간 적의 기관총 공격이 시작되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황소위는 개인호에서 기어나와 김소위의 곁으로 기어갔고, 두 발목을 잡고 능선 아래로 잡아 당겼다. 이미 총탄에 절명한 상태.
연락병과 김소위의 병사 2-3명을 데리고 M1 소총 대검으로 땅을 파 임시 매장했다. 그리고 표식을 위해 큰 돌 하나를 주어다 머리맡에 놓아 두었고, 마침 소나무가 잘린 나무 등결이 있어 그것을 표식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서너시간 후에 적의 역습이 시작되어, 그만 그 위치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황규만 장군의 동기생 262명 중에 6.25 때 전사한 인원이 113명이라고 하니, 김소위의 전사도 당시 전선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경주시 변두리의 간이 활주로에 착륙한 황대령은 준비된 앰블런스를 타고 안강 지구로 향했다.
그러나 전후 10여 년의 세월은 지형을 변하게 했고 나무를 울창하게 했으며, 사람들의 기억도 희미하게 만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찾기를 수 시간, 마침내 도음산 인근에서 표식으로 찍어 두었던 나무 등결과 돌을 찾았다. 무릎뼈와 발뼈 부분은 아래로 흩어져 내렸으나, 그 자취는 여전했던 것이다.
유골을 최대한 수습하여 하산한 시각은 오후 4시, 대구 비행장을 거쳐 강원도 OO에 있는 제1군 영현중대에 유골을 안치한 것은 다음날 오전 10시였다. 일요일에 화장을 시키고, 다음주에 육군 참모총장에게 청원 절차를 밟았다. 국립묘지 안장을 위해셔였다.
1964년 5월 29일에, 전사한 날로부터 14년이 지나 마침내 국립묘지에 안장되니, 묘역은 '동 제2묘역', 묘번은 '1659', 비명은 '육군소위 김 의 묘'이다.
이 이야기는 그해 6월 16일에 언론에 보도되면서 나중에 국어 교과서에 언급되기까지 한다.
황규만 대령은 곧 미국 육군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이후 주일대사관 무관, 제12연대장 등을 거쳤다. 수기는 이후 황규만 장군의 군생활과 예편 이후 경험을 더듬는다. 간간히 김소위의 신원을 찾기 위한 노력이 언급되면서...
황규만 장군은 국립묘지의 김소위 묘비 앞에 추모비를 세우고 김소위가 전사했던 장소에 전적비를 세웠다.
그러던 중, 1990년 6월 25일에 이러한 사연이 다시 한 번 언론에 보도되었으나, 유가족과의 연락은 아직 닿지 못했다. 이 즈음에 황규만 장군은 중대한 결심을 한다. 수기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면,
'그렇지 참, 내가 죽으면 저 장군 묘역으로 갈 것이 아니라, 이 통로 빈 자리로 와서 김소위하고 나란히 묻혀야지. 그래야 후일 자식들이라고 나를 찾아올 때 김소위도 함께 돌봐 줄 것이 아닌가. 나만 혼자 장군 묘역으로 가버리면 누가 계속 김소위의 묘를 돌봐 줄 것인가. 내 비석도 김소위 것과 크기도 똑같이 해달라고 해야지. 죽기 전 청원을 내면 내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나.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야.'
이다. 이 부분은 오늘 뉴스 화면에서 황규만 장군님의 증언으로 재차 확인되었다. 참으로 쉽게 할 수 없는 결정인 것.
사실, 이 장면에서 계급을 불문하고 전사한 순서대로 매장된다는 미 국립묘지가 떠올랐다. 대통령 묘역, 장군 묘역 등, 죽어서도 계급별로 대우하는 우리와 다른...
각설하고, 그해 11월 2일에 동기생들과 태릉 육사 골프장에서 운동을 하던 중에 라보현 대령이라는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 역시 예비역으로, 자신을 갑종간부 1기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황규만 장군은 라보현 대령에게 갑종간부 동기회의 존재 여부를 묻고, 동기생 명부가 있는지도 확인했다. 갑종 출신이라는 것을 단서로 수소문을 했으면 간단하게 풀렸을지도 모를 일이, 40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우연히 해결되게 된 것이다.
동기생 명부 가운데 포항 지구 전사자는 4명. 그 가운데 '김수영(金壽榮) 50. 8. 24'이라는 내용 눈에 들어왔다. 곧 국립묘지에 '김수영, 군번 117162'로 묘비의 존재 여부를 확인한 결과,
'중위 117162 김만영(金萬榮), 전사일 50.08.29 묘는 없으며, 현충탑 위패 봉안소 내 장교5구역에 위패만 있음'
으로 결과가 나왔는데, 이름은 명부를 옮기면서 변형된 듯 하고, 사망일자는 사령부까지 보고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 기록을 토대로, 보훈청의 자료를 확인하여 유가족을 수소문 했고, 결국 춘천에서 김소위의 유족을 찾을 수 있었다. 제적등본 확인 결과, 김소위의 정확한 이름은 김수영(金壽泳).
6.25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미흡한 행정 체계, 휴전 이후의 기록 시스템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착오이다.
황규만 장군은 그해 11월에 유족들을 만나 물었다.
"전사일자가 8월 24일이라는 것은 누가 그러던가요?"
라고 묻자, 대구 피난 시절에 김소위의 부하로 있던 병사를 길가에서 우연히 만나 물었더니, 김소위가 8월 24일에 전사했고 어느 장교가 시신을 포항 근처 산에 묻었다는 답변을 했으며, 김소위 유품인 지갑을 가진 병사가 부산 육군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동기생인 라보현 대령은 김소위의 별명을 '메기'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유족들의 증언과 일치했다.
이렇게 유족들을 확인한 후, 국립묘지와 전사지를 오가며 눈물 짓는 장면이 이어진다.
김소위의 신원이 확인되었음에도 아직 비명에는 '육군소위 김 의 묘'로만 되어 있다. 유족과 갑종 1기 동기생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이다. 이 역시 6.25의 비극을 간직한 산물이라는 뜻이다. 그 김소위의 이름은 묘비 옆 추모비에 새겨져 있다.
나중에 김소위 묘역 옆에 안장되었으면 하는 황규만 예비역 준장님의 청원이 받아들여지기를 기원한다.
=안강지구전투=
1950. 8. 27. 한 이름없는 소위가 전사한 곳.1964. 5. 29. 유해발굴하여 현충원에 안치.1985. 3. 13. 전사한 곳 (도음산:포항공원묘원)에 전적비 세움.1990. 11. 유가족 찾음.
우리 곁엔 적의 기관총에 전사한 이름모를 그 소위를 묻고 끝내 유가족을 찾으신 존경스런 노병이 있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