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묘소
외국인 묘역에는 화교인 지앙훼이린과 웨이시팡 두 분을 모셔져 있으며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다.
지앙훼이린은 1950년 1사단 15연대에 자원입대하여 적진정찰 및 포로심문 등의 임무수행 중 1951년 경기 과천에서 전사하였고, 웨이시팡은 1950년 10월 1사단 수색대에 임대하여 적진정찰 및 중공군 포로심문 활동의 공로가 있으며, 휴전 후 한의사로서 극빈환자 무료 진료, 장학사업 등 사회공헌에 기여하다 1989년 사망하였다.
이 두 분의 공적을 널리 알리고 후대에 길이 계승하고자 2012년 5월 15일 지앙훼이린의 묘를 웨이시팡 묘 옆으로 모셔 외국인묘역으로 조성하였다.
또한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진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계 캐나다인으로서 1916년 당시 한국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교장으로 있던 에비슨(Avison, O. R.)의 초청으로 세균학 교수로 한국에 들어왔다.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이 있자 파고다공원에서 한국인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는 광경을 촬영하여 국내외에 알리는 등의 활약으로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기까지 하였다. 박사는 학생과 죄 없는 부녀자들까지 마구 잡아가는 일본 경찰을 보고 일본 경찰국장을 방문하여 수많은 제자와 시민들을 석방시키기도 하였으며,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사건의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국제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등 음으로 양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0년에는 일경이 암살을 기도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으며, 여러 차례 구속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다시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였고 1968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임종시에는 “생전에 정든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이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박사의 유언을 존중하고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키로 의결하여 1970년 4월 16일 애국지사묘역에 안장하였다.
<안내문>
외 국 인 묘 소
Plots for Foreigners
○ 강혜림 (姜惠霖 지앙훼이린/ 1925 ∼1951)
화교로서 평양에거주하다 1950년 1사단 15연대에 종군하여 적진정찰
및 포로 심문 등의 임무수행 중 1951년 2월 경기도 과천에서 전사하였으며,
1959년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어 1964년 24번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그의 공을 후대에 길이 계숭하고 널리 아리고자 2012년 5월 15일에
이곳으로 모셨다.
○ 위쉬팡 (魏緖舫 웨이시팡 / 1923 ∼ 1989)
화교로서 1950년 10월 1사단 수색대에 입대하여, 적진정찰 및 포로 심문
활동의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휴전 후 한의사로서 극빈 환자
무료진료, 장학사업 등 사회발전에 기여하다 1989년 사망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2012년 5월 15일 그의 희생정신을 계승하고자 묘소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 프랭크 W. 스코필드 (石虎弼 / 1889 ∼ 1970)
영국계 캐나다인으로 1916년부터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이 벌어진 탑골공원 시위광경 및 제암리 교회 방화사건의 현장을
촬영하여 국내·외에 알리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1970년 사망하여 애국지사묘역96호에 안장되었다.
○ 지앙훼이린
지앙훼이린은 중국 화교로서 평양에 거주하여 오던 중 1950년 11월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하자 자진하여 우리 육군 1사단 15연대에 종군, 적정 수색과 포로 심문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1. 2. 2. 경기도 과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 분의 유해는 동지들에 의해 부산 화교 소학교에 임시 안치되어 있었는데 자유중국 대사관과 전우 화교들로부터 군묘지에 안장하여 줄 것을 요청받고 정부에서는 1964. 11. 13. 제110회 국무회의에서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을 의결, 1964. 12. 12. 국립묘지 제24묘역에 안장하였다. 그 후, 외국인으로써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유공자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널리 홍보하기 위해 2012.5.15. 12번 묘역으로 묘소를 이전하고 웨이시팡과 함께 별도로 묘소 조성하게 되었다.
이 분은 생전의 공적으로 1959. 6. 1. 은성 화랑 무공훈장을 추서받았으며 화교의 사기 앙양과 우방국과의 유대 강화를 위하여 우리 전몰 용사와 같은 대우로 국립묘지에 안장하게 된 것이다.
○ 웨이시팡
웨이시팡은 신의주에 거주하는 화교로서 1945년 중국 안동성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자유중국군 대위로 임관, 근무하던 중 1949년 국공내전에서 자유중국이 본토를 철수하여 대만으로 퇴각하고 만주지역이 공산화되자 신의주에 귀향 후 평양 근처 장산탄광 광부로 취업 후 한·중애국청년단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1950. 10. 국군 평양 진격시에는 보병 1사단 수색대에 편입, 적정수색과 첩보활동을 하고 중공군 포로심문 등을 실시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휴전 후에는 한의사로서 극빈환자 무료진료, 장학사업 등 국가 사회발전에 기여하다 ’89. 6. 25. 운명하였으며, ’89. 12.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90. 3.20. 제12묘역에 안장하였다.
<비문>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
묻어 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少年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
을 맡아 주세요
「유언」중에서
1889년 3월 15일
영국럭비시에서 출생
1970년 4월 12일
서울에서 영면
<약력>
1916 서울세브란스 醫學專門學校敎授로서
細菌學敎鞭을 잡다
1919 民族代表三十三人中 一人인李甲成으로부
터獨立示威計劃을 傳達받고三月一日
파고다公園周邊에서기다리고있다가
群衆과함께獨立萬歲를 高唱하며
現場光景등을 寫眞撮影하다
同年四月一日 京畿道水原郡鄕南面提岩里에서
住民三十餘名을 敎會에監禁한後石油
를뿌리고放火沒殺시킨日軍警들의
殘虐無道한現場을撮影하여
外國新聞에報道함으로써 世界
與論을 喚起하며 活動하다
1968 建國勳章獨立章을 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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