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많은 덕혜옹주
▲ 일본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 비운의 덕혜옹주 ♥ 기울어가는 왕실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마지막 皇女 덕혜옹주 그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고종(高宗)과 후궁인 양귀인(梁貴人)사이에서 태어났어요 고종이 회갑에 얻은 딸로 여섯살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되었지요 덕혜옹주는 부모와 많은 사람들의 축복속에 덕수궁에서 넘치는 사랑과 활기를 불어 넣는 한송이 예뿐꽃으로 자랐어요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지요 " 5월 25일 덕수궁 궁인 양씨가 딸을 낳았다 양씨에게 당호를 내렸는데 복녕(福寧)이라 하였다 " 라고 고종에게는 순종를 비롯하여 의친왕, 영친왕의 세아들이 있었지만 막내딸로 늦게야 덕혜옹주를 얻었지요 고종은 금이야 옥이야 보물처럼 덕혜옹주를 무척 사랑했어요 옹주의 나이 7살이 되자 덕수궁안 준명당에 옹주를 위해 유치원을 만들기도 했지요 고종은 덕혜옹주를 뒤늦게 얻은 여식이라 정말 보물처럼 귀여워 하였으며 시간이 날때마다 옹주를 불러 무릎위에 앉혀 놓고 어전의 상궁들에게 " 이 갓난애좀 보아라, 손을 만져 보아라 ,너무 귀엽지 않느냐? " 라고 했다 하네요 상궁들이 주군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어전에서는 고개도 들지 못한채 " 황송하옵게도 어찌 감히 아기씨의 손을 만져 보곘습니까? " 라고 대답하면 고종은 " 괜찮다! 머리를 들고 웃고 있는 이 아이의 얼굴을 보아라"라고 했다 하는군요 그러나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가장 외롭게 생을 마감했던 덕혜옹주 고종황제의 막내딸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족 !! 덕수궁의 꽃이라 불렸던 그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철저히 정치적 희생양이 될 운명이었지요 어린 나이에 고종황제의 죽음을 목격한후 일본으로 끌려가 냉대와 감시로 점철된 십대시절을 보냈으며 일본인과의 강제결혼 7년간의 정신병원 감금생활 일방적인 이혼통보 등을 겪으면서도 오직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터전을 다시 찾을수 있다는 희망" 만을 안고 살았지요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은 일본 패망 후에도 그녀를 찾지 않았어요 부황 고종황제가 죽자 일본에 끌려간 덕혜옹주는 천황가와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여자학습원에 입학 했지요 그러나 아버지 고종의 독살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인지 늘 보온병을 들고다닐 정도로 불안한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1929년에는 생모인 귀인 양씨가 사망하자 잠시 귀국한 옹주는 검은 양장 차림으로 슬픔에 겨운 모습으로 창덕궁에 들어가 어머니께서 계셨던 관물헌에서 잠깐 기거한후 또다시 일본으로 끌려 갔지요 1931년 5월 덕혜옹주는 도쿄대 출신 일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정략적으로 강제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옹주의 결혼소식을 접한 조선 백성들은 더욱 비탄에 빠지게 되었어요 "덕혜옹주는 양장을 입고 자동차로 소 백작 집에 이르러 11시25분부터 순일본식으로 혼례를 치르었다"는 짧은 보도가 있었지만 우리나라 신문에서는 결혼식 사진에서 일본인 남편의 얼굴을 지워버렸고 이후 조선의 신문 기사에서 덕혜옹주는 철저히 사라졌지요 옹주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어요 1947년 일본의 귀족제도가 폐지되면서 소 다케유키(宗武志)남편의 백작 지위는 강탈당했고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에 옹주는 마쓰자와라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지요 1955년 6월에는 애정없는 남편과 이혼을 하면서 홀로 쓸쓸하게 지내게 되었어요 옹주의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실패하였고 3개월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지요 그러나 그녀의 사인(死因)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발표 되었지요 해방이후 덕혜옹주는 한국인 에게서 거의 잊혀져 갔어요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이승만 정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공주를 찾는데 소극적 이었지요 1950년 보다못한 서울신문 도쿄특파원 김을한씨가 마쓰자와라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옹주를 찾아내어 이승만 정권에 옹주의 귀국을 요청했지만 이승만 정권의 반응은 냉담했어요 그런뒤 자유당이 몰락하고 장면 정권이 들어셨지만 반응은 더 심해 졌지요 그러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김을한씨는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박정희 의장은 "억울하게 살아온 옹주님을 빨리 모셔오라"는 일언지하(一言之下)호쾌한 승낙을 받아내어 마침내 옹주의 귀국이 성사 되었지요 1961년 10월17일 박정희 의장은 장면 정권때 날림으로 만들어진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의 대상을 개정·확대하여 대한제국 황족의 범위를 확대하였고 일본 마쓰자와라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덕혜옹주를 귀국시켜 국비로 모든것을 후원토록 조치 했지요 이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황실에 동정심을 품었던 박정희 의장은 옛 황족들에게 꾸준히 생활비와 치료비를 지급하였으며 매달 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에게는 50만환, 의친왕비(妃) 김씨에게는 30만환 고종의 후비인 광화당 귀인 이씨와 삼축당 귀인 김씨에게는 각각 10만환 등 모두 100만환씩을 지급하였지요 1962년 9월 26일에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해방이 됐어도 귀국하지 못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이된 의민태자(영친왕)와 이방자 여사에게 1945달러의 치료비를 지원하였고 1963년에는 의민태자의 귀국을 추진하여 그 해 11월 의민태자(영친왕)는 56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렇게 해서 옹주도 1962년 38년만에 꿈에도 잊지못한 그리운 고국땅을 밟았지요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의식까지 거의 불명인 상태의 몸으로 돌아 왔어요 귀국후 덕혜옹주는 정부의 따스한 배려속에 7년간의 병원생활을 끝내고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어요 그곳에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함께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조용한 말년을 보냈지요 1972년 전남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를 찾아왔지만 옹주는 만나주지 않았어요 1983년에 쓴 옹주의 낙서 한장은 대한제국 마지막 공주의 슬픈 운명을 더욱 가슴 아프게 하였지요 "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영친왕) 비전하(이방자 여사) 오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 " 이렇게 죽을때까지 내 조국을 사랑했던 덕혜옹주는 창덕궁 낙선제에서 영친왕 부인인 이방자 여사와 함께 살면서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요 '"조국에 있는 순간에도 조국이 그리웠다" 며 마지막 말을 남기고 ... 조선의 마지막 황녀(皇女)로 태어났지만 한번도 황녀로 살지 못했던 여인 누구보다 귀한 존재였지만 모두가 외면했던 그 여인은 그날 그렇게 영원한 자유를 찾아 먼길을 떠났어요 아버지가 계신 홍릉 뒤켠에 묻힌 덕혜옹주 그래도 아버지(고종황제)와 오빠(영친왕)가 곁에 있어 편히 잠들고 있는지도 몰라요 한많은 덕혜옹주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 있어요 -* 언제나 변함없는 산적:조동렬(일송) *-
▲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황실 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
▲ 고종이 예순 가까운 나이에 얻은 자식이라 끔찍이도 귀애(貴愛)했다는 덕혜옹주 ...
▲ 덕혜 옹주가 경성 일출 심상소학교에서 일본 급우들과 함께 수업을 받는 모습 ...
▲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 ...
▲ 일본 학습원 시절의 덕혜옹주 (德惠翁主) ...
▲1931년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소 타케유끼 · 덕혜옹주 부부 ...
▲ 1962년 1월 26일 고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창덕궁 낙선재) ...
▲ 병들고 지친 몸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
▲ 덕혜옹주의 친필 엽서 정말 대단한 필체이지요? 왕손들은 남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배움의 길을 걸어야 했나봐요 ...
▲ 홍유릉의 뒤편 작은 문이 있는 쪽이며 영원과 덕혜옹주의 묘로 가는 입구 ...
▲ 아버지(고종) 뒤켠에 묻혀있는 덕혜옹주 출입금지 문화재 구역으로 철망으로 울타리가 쳐있어 묘 가까이 갈수가 없다 하네요...
▲ 아버지와 오빠 곁에 잠들어 있는 비운의 덕혜옹주 ...
▲ 묘비에는 ' 대한 덕혜옹주지묘 (大韓 德惠翁主之墓)" 라고 쓰여있어요 ...
▲ 영원(英園)입구 길가에 서있는 문인석 ...
▲ 영친왕 부부를 모신 영원(英園) 안내문 ...
▲ 영원(英園)의 정자각 ...
▲ 영원 (英園 : 사적 제207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英王)과 부인 이방자(李方子)의 묘 덕혜옹주가 죽을때까지 함께 의지했던 이방자여사가 가까이 있어 외롭지는 않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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