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선시대 과거 시험문제

친가유 2014. 5. 1. 21:04

조선시대 과거 시험문제

 

 

 

"책문"을 아시나요?


"책문"은 조선시대 등용문인 과거시험의 문제와 이에 대한 선비들의 답안을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사극에서 한문 몇 자를 제시하여 문장을 지으라고 하는 모습과는 달리, 임금이 직접 당시 사회의 문제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책문에 나온 조선시대 과거 시험 문제~

1장.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ㅡ 광해군
2장. 술의 폐해를 논하라 ㅡ 중종
3장.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ㅡ 명종
4장.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 ㅡ 광해군
5장.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 ㅡ 중종
6장. 지금 이 나라가 처한 위기를 구제하려면 ㅡ 광해군
7장. 정벌이냐 화친이냐 ㅡ 선조
8장. 6부의 관리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ㅡ 명종
9장. 외교관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ㅡ 중종
10장. 교육이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ㅡ 명종
11장. 인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ㅡ 세종
12장. 처음부터 끝까지 잘하는 정치란? ㅡ 중종
13장.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인가 ㅡ 세종


그 외에도 전해져내려오는 기출문제들로는

1. 행정수도 건설문제 ㅡ (출제자: 세종)
    도읍을 두개 건설 하는 것은 어떤 뜻이 있는가?



2. 사례형 ㅡ (출제자: 세종)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임주;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그대 대부들은 사책(史策)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3. 독도문제 (출제자: 숙종)

"울릉도가 멀리 동해에 있는데 강원도에 속해 있다. 수로가 멀고 험해 섬사람들을 데리고 나오면서 현재 비어 있다.

요즘 일본인이 죽도(竹島)라 부르면서 백성들의 어로 활동을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우리 입장을 설명해도 (일본은) 들을 생각이 없다.

혹자는 장수를 보내 점거해 지키자고 하고, 혹자는 혼란을 만들지 말고 일본인의 왕래를 허용하자고 하는데,

변방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킬 방도를 강구해 자세히 나타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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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댓글>

 

가;

 

임금앞에서 치루는 전시가 뭔지나 압니까?
우선 글줄 나부랭이 읽었으면 지방에서 주최하는 진사나 생원을 뽑는 생원과에 입격하는게 통례입니다.
그리고 열씸히 몇년 더 파서 이번엔 한양에 올라가 시험을 치루는데 이것이 바로 소과죠.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이 생기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연차에 이르면 드디어 대망의 대과에 응시하는 자격이 주어 집니다. 그러니까 임금앞에서 시골에서 삼삼오오 모여들어 치루는 별시는 그저 특별시험일 뿐이죠.
이 대과라 해도 초시 복시를 치룬후에야 비로서 등수를 매기는 논술 시험인 전시를 임금 앞에서 치루는 것입니다.

이 전시의 시제는 경학에서 현안까지 모든 범위을 망라 합니다.
그래서 임금이 시제를 내려면 응시자는 우선 성리학적 소양을 동원하여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는가를 공문서 형식에 맞게 기술해야 합니다. 사단칠정이니 주기론이니 주리론이니 하는 풍월이 이때 등장 합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해 제기가 되었으면 그때부터 사기니,십팔사략이니 구당서 신당서니하는 중국 사서와 사서오경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사서와 해당되는 분야의 자기가 아는 모든 지식을 총 동원하여 문제에 대한 비슷한 사례들을 기술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시무책등을 이번에는 문학적 소양을 다하여 송소를 올리듯 그 답을 적어 내야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임금은 단 한번의 시험으로 응시자의 지식정도,정치적소양,포부,그리고 그 충성심과, 문학적 조예등 다방면 평가에 들어가는 것이죠.

이게 단지 식민지 사학에 경도되어 조선것이라면 무조건 까고보는 자기파괴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선시대의 제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현재로 봐도 진취적이며 세심하다할만한 제도들이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널렸습니다.

 

나;

 

광해군은 왕좌에 오르면서 정신줄 놓쳐버렸습니다.
아직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지도 않았는데 궁궐을 하나도 아닌 4개나 지어 백성들 등골 브래이커의 위엄을 확실히 뽐냈습니다.
의심병이라도 걸렸는지 남을 믿지 못하고 걸핏하면 옥사를 일으키니 결국 지지세력을 모두 잃었지요.
누가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만 나오면 닥치고 잡아 족쳐서 죽였습니다.
임금이 직접 국문을 진행하는 친국 횟수는 역대 조선 임금 중 광해군이 최대입니다. 취미가 탐정이였던지 역모 고변만 나오면 피고인들 잡아도 몸소 친국하는데 모든 일정을 보내 국정은 팽개치기 일수였습니다. 의심이 많아 자기가 직접 진상 파악하지 않고선 못배겨냈던겁니다.

이지경이니 광해군의 친위세력으로 일컷던 대북파와도 말년엔 사이가 틀어졌지요. 대북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광해군은 김개시같은 상궁에게 정치적 조언을 들을 정도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파멸은 이미 그의 정치적 실패에서 예약되어 있었던거죠.

 

아마도 선조의 정치 패악질에 적잖이 시달린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니였을런지. 양위쇼만 임란때 다섯번이나 해서 그때마다 광해가 분조 활동 하다가 일 팽개치고 한양으로 뛰어와서 석고 대죄했다고 합니다. 의심병하면 고려 광종도 유명하지요. 나중에는 태자까지 의심해서 정치적 분란이 되었을 정도로...

 

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 조선때 과거 제도도 저 도표대로 정교하고 공부 잘하는 인재를 등용하는 본질적 성격대로 운용되었으면 좋았겠지만 기실은 상당히 파행으로 점철됩니다.

김구가 응시하였다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때는 응시자 13만명이 한양에 몰려들었고 합격자 6명, 그나마 이미 다 사전에 예정되어 있었다고 하지요.

3년 식전제를 철저하게 지켰던 중국과 달리 조선의 과거시험제도의 특징은 편법과 정치적 특징이 많이 가미되었다고 합니다. 즉 정시보다 별시와 특별시가 배 이상 많아서 한명이라도 더 급제자를 만들겠다는 의도를 많이 드러냈었고 일부 집권 양반과 어려서 한학에 두각을 나타낸 천재급 인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경전 한번 아니보고 참고서만 들이 파다가 시험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집권 양반층의 자체는 돈, 시간 아낌없이 퍼부어서 과거를 통해 부와 권세를 세습하는 수단이되고 지방 향반은 자신의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비용대 효과면에서 우수한 지방시나 진사만 따먹고 양반 권위를 유지했으며 부유해진 평민은 합법적으로 몰락양반을 기용하여 예법과 그들의 족보까지 한꺼번에 일괄구매하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양반 계층 자체가 전체 인구 80%를 육박하여 조선의 정치적 안정은 이룩하는데 기여합니다.

한국민들이 극 평등 의식, 심지어 공산주의와 코드가 짝짝 맞는것도 어쩌면 조상 대대로 죽기만 하면 학생 부군 신위 달아놓고 족보 매입하거나 제작하여 소 양반으로 편입하는데 익숙해져서 그럴것 같습니다.

이점은 같은 과거제도라도 엘리뜨 양성 수단으로 청 제국 멸망때까지 엄격하게 유지했던 중국의 과거제도와 본질적으로 차이나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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