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백제 최후의 날. 왜 일본은 지원군을 보냈을까?

친가유 2009. 4. 4. 05:54

백제 최후의 날. 왜 일본은 지원군을 보냈을까?

 

 

 

  당시의 상황을 기록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면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엔 신라와 당의 연합군인나당연합군과 백제 부흥군이 있었고 강 위엔 왜와 당의 수군이 있었다. 이들은 여러 차례 접전을 벌였다. 663년 8월17일 하룻 동안의 전투기록을 보면 당과 왜의 수군이 접전을 벌였는데 불리해진 왜가 잠시 후퇴를 했다고 적고 있다.

 

  역사상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건이 백촌강 싸움이라고 생각된다. 기록에 보면 일본이 400척의 배에 27.000명의 정식군대를 보냈다. 여기에는 당나라가 참여했고 고구려가 참여했고 백제가 참여했고 신라가 참여했다. 당시 알려진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참여한 전쟁이다.

 

  당시 복신은 왜에 사신을 보내 당시 왜에 거주하고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복신의 요청에 따라 백제로 돌아온 부여풍은 곧이어 왕으로 추대되고, 본격적인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된다. 그러나 663년, 부흥군을 이끌던 부여풍과 복신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난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나당연합군은 백제부흥군을 기습공격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부여풍이 자신의 장수를 죽인 것을 안 신라가 곧바로 백제를 공격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왜의 지원군이 바다 건너 백강에 도착한다. 27,000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지원군이었다. 그리고 백강에선 왜군과 백제군 그리고 나당연합군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출병한지 보름만에 왜군은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만다.

 

  백강구전쟁으로 구심점을 잃은 백제는 이후 힘없이 무너졌다.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주류성도 백강구전쟁에서 패한지 불과 열흘뒤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663년 백강에서 벌어졌던 백강구전쟁, 그것은 백제 최후의 전쟁이었다.

 

  이렇게 동아시아 세력판도를 바꿔놓았던 백강구전쟁, 이 전쟁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건 바로 왜의 참전입니다. 당시 백제는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부흥군들만이 나라를 되살리기위해 신라와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백제를 왜는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이다. 일부 일본학자들이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속국이 아니라면 멸망한 나라에 대규모의 지원군을 보낼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일본학자들은 백강구전쟁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다. 그들 중 일부 학자들의 의견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백제.고구려를 조공국으로 유지하기 위해(鬼頭淸明) 기토라는 학자는 백제를 조공국으로 유지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즉 백제가 당시 왜의 하위국으로 조공을 바쳤다는 이야기이다.

 

2. 임나의 조공을 부활하기 위해 (山村圓澄) 이번엔 야마무라라는 학자의 의견이다. 여기서 임나라면 가야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일본 학자들은 고대일본이 가야지역을 200년간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임나의 조공을 부활하기위해서라는 건 자신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처럼 백제도 속국으로 통치

   하기위해서라는 것이다.

 

3. 왜왕권이 백제왕(부여풍)을 책임졌기때문 (八木充) 백제왕 부여풍을 책임졌다..? 사실 일본학자들이 백제가

   왜의 속국이라고 주장하는 건 이 부여풍이란 인물 때문입니다. 부여풍은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던 백제의 왕자

   인데, 부흥운동에 참여하기 전 부여풍의 행적이 흥미롭다.  이 기록은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기록인데..

 

"서명기 3년 백제 의자왕이 왕자풍장을 보내 질로 삼았다."
서명기 3년이라면 631년...631년에 백제왕자 부여풍이 왜에 보내졌다는 이야긴데...여기서 눈길을 끄는 건 바로 이 질(質)이라는 한잡니다. 인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자지요.

 

  그럼 이번엔 우리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661년"일찍이 왜에 질로 가있던 옛왕자 부여풍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고 되어있습니다. 왜에 있던 부여풍이 부흥운동을 위해 백제에 돌아왔다는 기록인데 여기에도 역시 질(質)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이 두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왕자 부여풍은 631년에서 661년까지 30년간 왜에 인질로 있었다는 이야긴데, 과연 부여풍은 인질이었던 것일까?

 

  부여풍은 인질이 아닌 백제왕족외교를 위한 대사였다. 백제왕자 부여풍은 왜 일본으로 갔을까? 우선 그의 일본에서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했다. 일본 나라현의 사쿠라이시..이곳엔 부여풍과 관련된 곳이 있다.

 

  미와산 -사쿠라이시안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지는 미와산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부여풍은 이곳에서 벌통 네 개를 놓아 길렀다고 한다. 이외에도 일본서기엔 부여풍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코우토쿠천황때인 646년엔 조정에서 하는 중요한 행사에 부여풍이 모습을 나타낸다. 천황을 비롯한 왜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참석하는 성대한 신년하례의식에 부여풍도 함께 한 것이다.

 

  부여풍이 일본 갔을 때 농장이라든지 벌꿀치기 이런 걸 했다.돌아올 때 부여풍이 그 사람이라면 30년간 규제되어있는 상황이다. 인질을 그렇게 오래 둘 리가 만무하다. 정치상황에 따라 활용하는게 인질인데 그렇게 오래동안 아무 변화가 없을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포로의 개념이 아니지않는가.

 

  그렇다면 부여풍이 30년동안이나 왜에 머문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백제왕자가 왜에 건너간 것은 부여풍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오월에 왕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왜국에 보냈다 근데 이 이후에 개로왕대에 461년에 개로왕대에 백제 개로왕의 동생곤지를 파견한다."

 

  처음 왜에 백제왕자가 건너간 건 397년.. 아신왕의 아들이었던 전지였다. 이후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무령왕의 아들이었던 사아군...성왕의 둘째아들이었던 혜, 위덕왕의 아들이었던 아좌..그리고 마지막으로 의자왕의 아들이었던 풍장이 631년 왜로 건너갔다.

 

그런데 이들이 왜로 건너간 시기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제일 처음 왜로 건너간 왕자인 전지를 보면 그가 일본에 간건 397년이었다. 이때 백제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광개토대왕비...이 비문엔 전지가 왜에 파견되기 바로 1년전...백제의 상황이 기록되어있는데..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58개의 성과 700개의 마을을 빼앗겼다. 백제로선 최대의 국가적인 수난이었다.

 

  곤지가 왜에 파견된 건 461년..427년 고구려 장수왕은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긴다. 그리고 455년과 469년 두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에 쳐들어온다. 백제로선 국가적인 위기의 순간이었다. 더구나 그동안 우호관계를 맺고있던 가야국이 백제에 등을 돌리고 신라와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고립의 위기에 처하게되자 곤지파견 백제는 왜에 곤지를 보낸다...백제는 위기때마다 왜에 왕족을 파견한 것이다.

 

  실제 전지가 왜로 건너간지 2년만이 399년..왜는 처음으로 백제에 군대를 보낸다. 백제와 내통한 왜군이 신라의 국경을 넘자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백제가 위기때마다 왜는 지원군을 파병한다.

 

   그렇다면 왜가 백제와 손을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단서는 바로 이곳 일본 나라현에 위치한 호오류사에 있다.  호오류사는 백제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지은 절로 수많은 유물을 통해 백제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절이다. 그런데 이곳에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주춧돌이다. 집을 지을때면 의당 들어가는 것으로 신기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이 주춧돌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본 후쿠오카에 위치한 미즈키 발굴현장...이곳엔 고대 일본인들이 살았던 집의 형태를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있는데 바로 곳곳에 파여있는 구멍들이다. 우리와 같은 주춧돌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않는다. 고대일본인들은 바닥에 구멍을 뚫고 나무기둥을 꽂은 뒤 그 위에 나무껍질을 얹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백제인들은 주춧돌을 이용해 견고한 건물을 짓고 있었다. 나무기둥을 이용한 원시적인 형태의 집에 살던 왜인들에게 주춧돌을 전해준 것이 6세기중엽 백제의 기술자들이었다. 백제문화에 대한 우수성 백제문물에 대한 선진성 이런 걸 상당히 강하게 느낀거다 당시 왜국은 4세기 기내에 대화정권 왜왕권이 4세기이후에 출현하면서 5세기 6세기 고대국가 형성과정이 있었다. 그러니까 우수한 문화 문물이 필요하던 때다.

 

  실제 일본서기를 보면 왜로 건너가는 왕자나 사신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기술자와 의학박사...그리고 학자들을 대동했던 것이다. 백제에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진문물을 가지고 간다. 책을 가지고간다거나 이런 선진문물을 가지고 가고 있고 일본에서 백제에 보내는 걸 보면 대부분 군사원조와 관계있다 따라서 큰 눈으로 보면 일본은 한반도에서 신라고구려와 싸우고 있는 백제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주고 백제는 일본에 선진문물을 제공해주는 관계였다. 따라서 거시적으로 얘기하면 당시 백제와 일본관계는 특수한 용병관계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여풍도 같은 이유로 왜에 건너갔을까?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면 642년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했다. 그리고 그 해 8월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당항성을 쳤다. 이렇게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침략을 받자 신라는 당에 지원을 요청했고 당태종은 곧바로 고구려를 침략했다. 이것는 곧 백제에게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이때 왜에 파견되어있던 부여풍...그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일본서기엔 부여풍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한가지 전해지고 있다. 

 

혈호국사로부터 흰꿩을 받은 천황 코우토쿠가 부여풍에게 흰꿩의 의미를 물었다. 그러자 부여풍은 태평성대를 뜻하는 이는 좋은 징조라 했다. 부여풍은 왜 천황의 자문역할을 했던 것이다. 풍장의 그런 행동 왜왕과의 사이에서 측근에서 자문역할을 할 수 있던거는 바로 이런 풍왕자의 역할 성격이 단순한 인질이나 추방당한 사람이 아니라 왕과의 잦은 자문역할을 통해 백제왕의 모종의 외교적인 임무를 띄고 자주 접족을 하면서 친백제노선외교를 추진하는데 노력을 한 증거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부여풍이 인질이 아닌 외교사절이었다는 건 부여풍이 백제로 돌아올때의 상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부여풍이 귀국할때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百濟王子 豊璋 率軍五千餘 衛送於本鄕" "백제왕자 풍장..즉 부여풍이 귀국할 때 군사 5천명을 보내 백제로 돌아가는 길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부여풍을 따르는 사람이 5,000명이나 될 정도로 그 귀국행렬이 성대하고 화려하였던 것이다. 이는 부여풍이 인질이 아닐 뿐 만 아니라 백제가 왜의 속국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또하나의 근거이다.

 

  그렇다면 왜가 백제에 지원군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중의 하나는 30년간 왜에 거주하면서 외교사절의 역할을 충실히 했던 부여풍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왕족을 이용한 백제외교술의 성과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시의 상황이 납득이 되질않는다. 663년 백강구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백제가 멸망한 뒤였다. 국가적인 외교관계가 더 이상 지속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왜가 대규모의 지원군을 백제에 보낸데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지난 97년 2월...일본 나라현의 사쿠라이시에선 중요한 유적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동안 이름만 전할뿐 그 터가 확인되지않았던 일본최초의 국립사찰인 백제대사 터다...사찰에...그것도 일본최초의 국립사찰에 백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절터에서 발견되는 각종 유물에서도 백제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왜가 국가에서 세운 사찰에 굳이 백제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절을 지은 건 죠메이천황때인 639년... 천황은 백제천의 서쪽에 백제대사를 지으라고 명한다. 그런데 이때 건립한 건 백제대사만이 아니었다. 그 맞은편인 동쪽엔 백제궁을 지었고 백제궁 북쪽엔 빈궁을 짓고 그곳을 백제대빈이라 하였다. 이렇게 자신이 기거하는 곳에 모두 백제라는 이름을 붙인 죠메이천황...

 

  그는 백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것일까?

왜조정..특히 천황가와 백제의 관련성을 더욱 짙게하는 것이 663년 백제의 지원군 파병과정이다. 아스카엔 지원군파병에 관련된 유적이 남아있다. 당시 백제에 지원군 파병을 결정했던 사이메이천황은 파병직전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이메이천황이 지원군파병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스카에 인접한 오오사카, 오오사카를 상징하는 오오사카성앞엔 궁터가 하나 남아있다. 주춧돌만 남아있을 뿐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663년 당시 이곳엔 나니와궁이 있었다. 아스카를 떠나 이곳까지 온 사이메이천황은 이곳에서 군사를 모으고 무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사이메이천황은 군사모집만을 지휘한 것이 아니었다. 사이메이 천황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지금의 후쿠오카 지역까지 오게된다.

 

  그러나 사이메이천황은 지원군이 백제로 파병되는 모습을 보지못한다. 아사쿠라궁터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제명제고장지.. 제명 즉 사이메이천황을 장사 지낸 곳이라는 뜻이다..지원군 파병직전 사이메이천황은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다..  당시 왜인들 사이에선 지원군의 패전을 암시하는 동요가 떠돌았다고 한다.

 

  "마비락을 출발하는 궁례들이 오는 해다. 아아 북놀이에 갈까 비가 온다고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놀러가는 비오는 해다 아아 북놀이에나 갈까 갈때도 올때도 비오는 해다 아아 북놀이에나 갈까"

 

  이 동요는 당시 왜인들 중엔 지원군파병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이메이천황의 죽음과 무관하지않아 보인다. 결과적으로 보면 제명도 거기서 죽는다.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 밝혀지지않았지만 아마도 출병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게 아닌가..

 

  이렇게 반대세력에도 불구하고 출병을 감행했던 사이메이천황의 뜻은 사이메이 천황에 이어 황제자리에 오른 텐지천황에 의해 실현된다. 현재 일본 시가현 오오츠시에 있는 오미신궁에 모셔져있는 텐지천황은 상복을 입은 채로 백제에 지원군군파병을 명령했다. 오미신궁엔 건물앞마당 중앙에 해시계가 놓여있다. 그런데 이 해시계엔 왜에서 백촌강까지의 거리가 표시되어있어 당시 백강원정에 대한 천황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천황이 직접 나선 지원군파병..그것은 고대 일본 천황가와 백제가 밀접한 관계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그동안 일부 국내학자들 사이에선 일본천황가가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의견들이 제기되곤 했다. 그리고 그 중엔 일본천황가의 뿌리를 백제로 보는 주장도 있었다. 과연 일본천황가와 백제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일본 나라현의 아스카.. 이곳엔 이시부타이 고분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돌무덤이 있다. 현재 석실내부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공개되어있는데 내부에서 돌들 팬..가리키며 설명 9" 50여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규모다. 무덤을 만드는데 쓰인 돌의 크기도 상당하다. 그 중 천장석의 무게는 무려 77톤에 달하는데 이 돌을 사람의 힘으로 옮겼다면...그만큼 무덤 주인공의 권력이 막강했음을 의미한다. 과연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 고분에 묻힌 사람은 일본에서 소가노우마코라고 부르는데 1400년전 당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분이다. 이분의 선조 정확하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백제에서 온 사람이다. 한국에서의 이름은 목례만치 일본에서는 소가노마치라고 하는 분이다.

 

  실제 삼국사기에는 목협만치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는 목례만치라고도 불린다.

475년 기록을 보면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웅진으로 천도하는 위급한 상황이었는데 이때 목례만치가 문주왕과 동행한다. 그러나 웅진성으로 천도한 뒤엔 삼국사기 어디에도 목례만치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않는다.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목례만치와 성만 다를뿐 이름이 똑같은 소가노 만치라는 인물이 이후 일본역사서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한성이 고구려에의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할 때 공을 세운 귀족으로서 목례만치라는 귀족이 있다 이 사람이 웅진천도의 절대적인 공을 세운 뒤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고 있는데 이 사람이 일본열도로 망명해가서 소가지역을 개척하게 되고 거기서 세력을 부식시켜나가는데 6세기말에는 일본조정 왜조정에 강대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해나갔다. 그렇다면 백제출신이었던 목례만치는 이국 땅,왜에서 어떻게 권력을 잡았을까?

 

  일본 나라현에 위치한 아스카지...일본최초의 사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사찰을 지은 사람이 바로 목례만치 즉 소가노만치의 증손인 소가노 우마코다. 6세기중반에 백제에서 많은 기술자들이 갔는데 이 기술자들을 전부 소가씨가 거느리고 있었다. 그것이 경제적인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선진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권력의 상층부에 올라갈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실제 당시 백제문화의 영향력을 짐작케하는 기록이 있다...
"아스카지의 완공을 기념한 사리안치식에 참석한 인사들이 백제옷을 입자 보는 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그만큼 백제문화는 왜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소가노가문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소가이목례만치 즉 소가노만치의 손자인 소가노 이나메에겐 두 딸이 있었다. 그는 두딸은 29대 천황인 힌메이와 결혼을 시킨다. 그리고 요우메이 스치코 스슌이 차례로 두 딸을 요우메이천황과 스이코천황과 결혼 시킨다.그 리고 스슌천황을 낳는다. 소가노가문은 3대에 걸쳐 천황가의 외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지않는 왜왕을 퇴출시킨다든지 그럴 정도로 왜조정을 좌지우지했던 위치에 있었다. 소가노가문은 이렇게 6세기에서 7세기중반까지 100여년간 권력의 핵심에 있으며 백제의 선진문물과 문화를 왜에 전해주었다. 그리고 왜천황이 친백제적인 정책을 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로 이즈음 천황자리에 있었던 인물이 백제궁과 백제대사를 지었다는 죠메이천황이고, 그 뒤를 이어 그의 부인인 코우교쿠가 황제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코우교쿠천황은 즉위 4년만에 천황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그것은 코우교쿠천황의 동생인 고오토쿠 황제와 황태자 나카노오에가 일으킨 다이카개신이라는 사건때문이었다. 당시 나카노의 황태자는 천황가의 외척으로 100여년간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소가노일족을 모두 죽인다..백제계가문인 소가노가문의 몰락이었다. 중대형황자는 왜 소가노가문을 제거한 것일까?

 

  6세기 후반에 신라가 한강유역하류를 점령하고 중국에선 북조가 통일되면서 백제와 중국보다 신라와 중국..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따라서 선진문물의 도입을 필요로하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신라나 고구려와의 관계가 더 절실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친신라 친고구려적인 정책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소가씨로서는 친신라정책은 소가씨의 입지를 잊어버린다. 그래서 이걸 반대하는 소가씨를 타도하고 당나라 신라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서 친신라적인 정권을 세운 게 대화개신이다. 다이카개신의 주역은 바로 코우교쿠를 폐위시키고 그 뒤를 이어 천황에 오른 고오토쿠와 황태자 나카노오에다. 그런데 왜조정에선 또다시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고오토쿠와 나카노오에 사이내분이 발생한 것이다.

 

  고오토쿠와 나카노오에간의 갈등은 황태자 나카노오에가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권력을 잡은 나카노오에는 자신의 어머니를 다시 천황자리에 올리는데 그가 바로 백제에 지원군파병을 결정한 사이메이천황이다.

 

  중대형황자와 천황인 호뎍천황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나다 따라서 이 중대형이 권력을 장악하기위해 친신라적인 효덕천황을 무너뜨리기위해 결국 옛날의 친백제세력과 손잡지않을 수 없다 이 세력과 손을 잡고 다시 권력을 장악한게 650년경이다 친백제세력으로 권력을 잡은 중대형황자로서는 당연히 군대를 보내지않을 수 없게한 배경이 있다.

 

  백제에 지원군을 보냈던 663년...천황가의 권력기반은 백제계 세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속에 663년 드디어 왜선 1.000척과 왜군 27.000명이 백강으로 오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의 지원군 파병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백제군과 왜군의 처참한 패배로 끝이 나고 만다. 그리고 이것은 왜에 크고작은 변화를 가져다준다.  일본 후쿠오카현의 타자이후시. 이곳엔 백강구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왜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 있다. 언덕을 따라 견고하게 쌓여진 오오노성.. 산기슭에 거대한 돌을 켜켜이 쌓아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막고 있다. 실제 일본서기에 보면 백강구전쟁에서 패배하고 2년 뒤인 665년 달솔 답본춘조를 보내 오오노성을 쌓는데 달솔은 백제의 지방행정관이다. 그러니까 백제기술자를 이용해 오노성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이때 왜는 오노성외에 10여개의 성을 일본열도 곳곳에 쌓는다. 백제가 무너지게 되자 왜조정은 굉장히 긴장한다 왜냐하면 백제의 몰락은 그대로 끝나는게 아니라 일본열도의 군사적인 위협으로 백제몰락이 다가오기 때문에 일본열도를 방어하기위해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된 그런 상황에서 백제계장군을 동원해 성을 쌓는다.

 

  당시 왜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 또 한 곳 있다.  일본 시가현 오츠시의 주택가 한켠에 그리 넓지않은 터가 있는데 이곳은 천황이 머물던 궁터라고 한다. 663년 백강구전쟁에서 패한 직후 왜는 아스카에서 이곳 시가현의 오오츠로 궁을 옮긴다...침략에 대비해 수도를 내륙 깊숙한 곳으로 옮긴 것이다.

 

왜는 내부적으로도 급격한 변화를 겪게된다. 그건 백강구전쟁이후 백제유민들이 대거 왜로 건너오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로 보면 665년 백촌강(백강)에서 패한 백제왕족을 나니와에 살게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진같은 경우는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화폐라고 볼 수 있는데 그 화폐발행은 철저히 국가가 관장하는 일이고 엄격하게 일본에서는 사주전 즉 사사로이 동전을 만드는 일을 금하고 있었다 특별히 백제왕에게 만들게 했다면 그당시 백제왕의 사회지위가 일본왕가에서 충분히 인정하고 화폐주조해도 괜찮다는 신뢰할 수 있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오사카지역의 주택가에서 어렵지않게 볼 수 있는 백제라는 성씨의 문패...이는 백제왕족들이 이곳에 정착한 이후 갖게된 성씨다.

왜는 이렇듯 백제왕족들에게 각별한 대우를 했다.

 

  실제 오츠시 곳곳엔 당시 백제유민들의 활약을 볼 수 있는 유적이 있는데 오미신궁옆 주택가엔 비석이 세워져있다. "시가현 권학당 유적" 비가 있다. 권학당은 지금으로치면 일종의 국립대학이다..이곳에 권학당을 짓고 왜인들을 가르친 사람이 바로 백제인이었다. 율령국가는 여러 가지로 측면할 수 있지만 관료들이 중심이 되는 국가다. 따라서 백제에서 건너간 관료들이 일본의 율령국가를 형성해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하나는 역시 당시 백제에서 많은 사람이 건너갔고 선진기술을 가지고 있어 전반적인 일본의 수준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으리라 생각된다.

 

  일본 시가현에 있는 석탑사. 이곳엔 백제인들이 만든 수많은 석탑과 불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백강구 전쟁에서 패한 이후 페쇠적인 외교정책을 폈던 왜. 그러나 오히려 이 시기, 왜는 율령체제의 확립을 통해 국가적인 기틀을 다지게된다. 그것은 그 안에 수많은 선진문물과 문화를 남긴 백제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흔히들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려면 일본을 봐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그건 백제와 고대일본..즉 왜 사이의 친밀한 외교관계의 결실일 뿐만아니라 백제멸망이후에도 왜속에서 백제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인들의 흔적이다.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에 대한 시각은 너무도 크게 차이가 난다. 일부 일본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있는 일본이 가야를 200년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도 그렇고 백제가 왜의 속국이라는 주장도 그렇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않았던 백강구전쟁..그것은 아직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있는 고대한일관계를 밝혀주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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