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해양제국 백제의 영역
1) 2차례에 걸쳐 백제 동성황제에게 참패를 거듭한 선비족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는 힘으로 강경책을 쓰는 것은 불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그는 정책을 바꾸어 중국 변방의 세력들을 중국인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펴니,그 때부터 중국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주위의 모든 세력들을 융합한 대동연합국가로 서서히 변하여 갔다.
2) 백제는 이 때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여 명실공히 대해양제국(大海洋帝國)을 건설하였다.
3) 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에 백제의 영토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越州)를 포함하고, 북쪽으로 바다 건너 가우리 국경까지, 남쪽으로 바다 건너 왜국(倭國)을 포함하여 다 백제의 땅이다. 백제는 동,서 두 곳에 서울을 두었다." 두 서울이란 서백제의 중심지 요서지역과 백제본국 한반도지역(서울=>웅진)이다.
4)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최치원전(崔致遠傳)에 따르면, 백제는 전성기에 백만대군으로 오(吳),월(越), 연(燕), 제(齊), 노(魯)나라를 다 장악했다 하였다.
5) 주서(周書)의 백제전엔, 동진(東晋)때부터 남송(南宋)과 양(梁), 나라[奈浪]때까지 백제는 양쯔강 양쪽을 다 점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6)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에 따르면, 금주(錦州), 의주(義州), 애춘(愛瑃)을 포함한 지역을 다 백제의 강역이라했다.
백제라고 할 때는 요서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온 구태세력을 의미한다. 100가족이 바다를 건너왔다고 해서 백제가 된 것이다. 고추모와 소서노의 아들 온조의 나라는 마한의 제후국 십제이고, 고추모의 아들 유리의 왕위승계를 허락하고 두 아들 온조.비류를 데리고 진.번조선의 경계지역인 요동반도에 개국한 어하라는 소서노와 우태의 아들 비류의 나라다. 이후 비류세력은 마한의 온조나라(십제)에 통합된다.
고추모가 북부여 단군에 즉위한데 반대하고 요서를 근거지로 만주지역에서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고구려와 전쟁을 벌여 온 동명성왕 고도막칸의 후예 구태세력은 이 <왜=한반도 서남부 지역의 토착마조선 해상세력>세력을 등에 업고 온조세력을 통합하고 온조세력과 혈통적으로 친척인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다고 봐야 한다.
일본열도는 백제세력이 지배한 담로지역
고구려에게 한성백제가 망하자, 개로왕의 동생 문주왕의 웅진천도를 적극 도왔던 충성파 목협씨가 문주왕 시해사건이후 일본열도로 망명하여 백제와 일본열도와의 무역독점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하여 그 후손들이 소아씨로 성을 바꾸고 일본권력을 장악하여 200년간 세도정치를 하였다.
왜(倭)를 200년간 주름잡았던 소아씨(蘇我氏)
왜(倭)를 200여년간 쥐고 흔들었던 소아(蘇我-소가)씨 무던. 석무대
백제 무덤 횡혈식 석실에 잠들었던 소아씨는 봉분이 없어져 무대가 됐다.
천황을 4명이나 갈아 치우고, 살해까지 했던 고대 일본 최대의 호족 소아씨의 선조는 소아만지(蘇我満智)라는 사람인데, 이 인물이 한성백제 멸망 후 문주왕을 모시고 웅진으로 천도하는데 기여한 목협만치(木劦滿致)라는 것은 한 일 사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이 목협만치에 대한 삼국사기와 수서 백제전을 더듬어 보자.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21년(AD475) :
(전략)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문주가 곧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목협, 조미는 모두 복성인데, 『수서』에서는 목협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 신당서 열전 백제전 :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경사에서 동쪽으로 6천리 남짓한 바닷가 양지쪽에 위치해 있다. 서쪽은 월주, 남쪽은 왜, 북쪽은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 동쪽은 신라다. 왕은 동, 서 2개 성에 거처한다. 관직으로는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내신좌평, 재정을 관장하는 내두좌평, 예를 주관하는 내법좌평, 위병을 관리하는 위사좌평, 형벌을 주관하는 조정좌평, 외병을 장악하는 병관좌평이 있다. 나라에는 6방을 두어 1방이 10군을 통솔한다.
나라의 큰 성 8이 있는데 사씨, 연씨, 협(劦)씨, 해씨, 정씨, 국씨, 목(木)씨, 백씨다. (하략)
삼국사기 기록을 고찰해 보면 수서 백제전에 나와 있는 "백제 8대성"에 대하여 논평을 하고 있다. "백제 8대성"이라는 목(木)씨와 협(劦)씨는 개별 성씨가 아니고, 목협(木劦)씨 라는 말이다. 목(木)씨와 목협(木劦)씨가 동일할 수는 있지만, 협(劦)씨는 없다는 말이다. 다만, 신당서 기록은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살펴 보자. 일본의 위키 백과사전에는 소아(蘇我-일본 말. 소가-)씨를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목협만치와 소아만지의 관계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곤지왕은 개로왕 동생으로 되어 있다.
○ 일본 위키 백과사전 소가씨 :
소가씨(蘇我氏)는, 고대 호족중에서, 제일가는 대호족이다. (후지와라씨는 별도로 취급으로 한다.) 그런데, 모노노베(物部), 오오토모(大伴)씨 등처럼, 신화나 전설시대부터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씨족이 아니고, 고분 시대가 막을 내리고 나서, 아스카(飛鳥)의 대호족으로서 갑자기 등장한다. (중략)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일본으로 도래한 일족이 점차 힘을 길러 아스카(飛鳥) 시대 직전에 일본의 정치 무대에 뛰어들 게 되므로서, 비로소 출현한 것이다. 이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도래한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 및 무기를 바탕으로,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한 후 권력 중추에 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중략)
어찌되었든, 소가씨(蘇我氏)는 소아만지(蘇我満智)가 그 정점에 서 있는데, 그는 조정의 재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조정의 재물 관리),
이들 도래인 중 신라계인 진(秦)씨는 출납을 동문씨와 서문씨는 장부를 취급하는 일을 맡아았다. 백제계인 아야(漢)씨도 재물을 관리 했는데, 이들 두 계통의 도래인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었지만, 모두 소가씨의 지휘 감독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일본서기 ) (하략)
일본을 쥐고 흔들었던 소가씨가 아스카시대 직전에 갑자기 나타났다. 소가씨의 선조는 소아만지인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인물이 바로 백제의 목협만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협만치는 어떻게 왜국으로 갔을까? 그가 왜국으로 망명한 이유는 문주왕의 피살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문주는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살해 되는데,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 보자.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문주왕 :
(전략) 4년 가을 8월, 병관 좌평 해구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여, 법 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임금을 경시하였으나 왕이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9월,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외부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으로 하여금 그를 해치게 하여, 왕이 마침내 사망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병관좌평 해구가 문주왕을 살해했는데, 이 과정에서 목협만치는 피살되었거나, 탈출하여 왜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정치 상황이 바뀌면 일본열도에는 갑자기 새로운 복성이 출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목협만치의 탈출여부가 아니라, 이 목협만치가 복성이라는데 있다. 삼국사기 개로왕 조를 보면 다섯명의 복성이 나타난다. 두 명-재증걸루, 고이만년-은 백제 왕실에 대한 반역자고, 두 명-목협만치, 조미걸취-은 백제 왕실에 대한 충신이다. 그리고 한명은 백제 왕가인 부여씨(扶餘氏)이고... 삼국사기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부여씨를 제외한 한성백제 멸망시기의 이들 복성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데 있는 것 같다. 바로 흑치상지 묘지명과 "당유인원기공비"에 기록된 귀실복신이 바로 그것이다. 흑치상지 묘지명에는 그의 조상이 흑치에 봉(封)해져서 흑치씨가 되었다고 중국인 손에 의하여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귀실복신의 4촌이 부여의자-의자왕-이다. 4촌인 의자왕은 부여씨인데, 복신은 귀실씨이다. 4촌간에 성이 다를 수 있는가? 이는 신라의 제도를 계승한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성을 바꾸다니... 그런데, 이렇게 4촌만 되면 성을 갈아야 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일본 천황가이다. 일본 천황가는 천황의 형제는 친왕(親王)이라고 부르고, 친왕의 아들들은 천황으로부터 성을 봉해 받고 일가(一家)를 창립하게 된다. 백제의 방식은 그대로 일본 천황가에 전해진 것으로 사료된다. 백제 역사는 신라 후손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풀을 수 없다. 백제의 방식대로 풀어야 한다.
개로왕의 기록은 14년부터 나온다. 결국 백제 왕실의 반역자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개로왕 원년부터 13년 사이에 역모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그래서 한성백제 함락후 그들은 개로왕을 아차산성에서 한강 물속으로 떨어뜨려 매장권을 빼앗는 것이다. 백제인의 매장권은 죽는 자의 신성한 권리였는데... 백제는 반역자는 어떻게 처리하는가 신당서 백제전과 삼국사기를 통해 알아 보자.
○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20년 (AD475년) :
이 때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 걸루, 고이 만년[재증, 고이는 모두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斯摩)([혹은 융이라고도 한다.]이니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이오,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 모대왕이 재위 23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가서 한솔 해명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하략)
○ 신당서 열전 제145 백제 :
백제의 법은 반역한 자는 목을 베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사람을 죽인 자는 세명의 노비를 보내어 속죄케 한다.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하면 그 물건의 세 배로 갚게 하고, 종신토록 가두어 둔다. 풍속은 고구려와 같다.
두 사서에 있는 세가지 기록을 검토해 보면, 백제는 반역자는 목을 베어 죽이고, 땅에 묻을 수 없도록 강물에 던져 버린다는 것이다. 고구려 장수 고이만년과 재증걸루는 백제 장수로 개로왕을 아차산성-구리시 아차산- 밑으로 데려가 죽인 후 한강물에 던져 버렸다는 말인데, 개로왕의 매장권을 빼앗은 것이다. 그 둘은 백제에서 모반을 하다가 발각되어 그들의 가족이 모두 몰살되어 한강에 던져 졌기 때문에 개로왕에게 그대로 복수한 셈이다. 이들 두 복성은 모반을 해도 되는 신분인 개로왕의 4촌이나 6촌 쯤 되는 인물고 결국 백제 부여씨에서 분화된 복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복성은 백제왕 부여씨로부터 분화한 성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제 복성이 삼국사기에 갑자기 튀어 나오는 것은 모두 정치적 변화가 일어날 때 백제 왕실의 동요가 일어났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기록을 한 것이다.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백제 복성은 많이 있었겠지만, 평시에는 이들의 동요가 적었기 때문에, 삼국사기는 사료가 없어 기록을 못한 것이다. 그러나 백제 복성들은 정치적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바다 건너 왜(倭)국으로 망명을 선택했기 때문에 일본서기에는 불쑥불쑥 백제 복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소아씨 들이 세운 나라시(奈良市)에 있는 아스카사(飛鳥寺-비조사-).
아스카(飛鳥)는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의 고향이고, 백제인들은 마치 새처럼 날라갔다.
이 절에 백제인들이 만든 커다란 불상이 있다.
따라서 백제본기 개로왕 조에 나오는 목협만치는 문주왕의 4촌이나 6촌이 되기 때문에 백제가 위급한 상황에서 왕족으로 그들의 왕을 위해 활동한 것이 삼국사기에 포착되었을 뿐이다. 목협만치나 그의 자손이 왜국에 망명해서 소아(蘇我-소가) 지역에 정착함으로써 목협씨는 소아씨가 된 것이고, 이 소아씨는 백제 왕족인 셈이다. 소아씨가 백제의 왕족이기 때문에 그들은 오사카 지역에 창고를 가지고 백제와 무역을 할 수 있었고, 재력을 바탕으로 왜왕실을 쥐고 흔들었던 것이다. 소아씨 일족이 부를 축재했던 배경도 결국 백제 왕실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나니... 200년 세도는 천황씨에 의해 몰살을 당해 한 줌의 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백제씨가 백제씨를 몰살시켰다. 형제도 반역을 하면 죽이는데 하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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