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수의 전쟁
중국 양자강 하류에 있는 양주시, 양주는 수양제가 살아 생전 가장 아끼고 사랑 했던 곳이었다. 양주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마을에 수양제의 무덤이 있었다. 황제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봉분이었지만, 그 앞에 세워진 비석은 무덤의 주인이 분명 수양제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동안 돌보는 손길 하나 없었는지 봉분의 흙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누군가 무덤 꼭대기에 나무로 쐐기를 박아놓은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양제의 무덤은 그동안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그만큼 수난을 겪어 왔던 것이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듯 철저히 버림 받은 것일까?
그 실마리는 오히려 수양제가 후손들에게 남긴 커다란 유산에서 찾을 수 있었다. 1300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양제의 유산, 그것은 양자강과 황하는 잇는 대운하였다. 중국의 3대 기적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대운하는 수양제 필생의 대사업이었다. 수양제는 이 운하는 만들기 위해 30년동안 4.500만명 이상의 인원을 동원하는 집념을 보였다. 완성된 운하의 길이는 1300킬로미터에 이른다.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 수양제는 무슨 목적으로 이토록 거대한 물길을 낸 것일까?
운하의 시작은 양제의 아버지은 문제로 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양제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운하는 남과 북의 물자와 인원을 이동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중국의 통일전쟁과 고구려의 정벌을 위한 것이다. 운하의 끝인 남경 남부에는 탁군이란 지역이 있었다. 이 곳이 바로 고구려 정벌의 출발지다. 612년 1월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에 나설 때도 전국 각지에서 소집한 군사들이 운하를 타고 이곳 탁군으로 집결했다.
당시 원정군 규모는 좌군대장 우문술이 지휘하는 좌군 52만 8천명. 대장 우중문이 지휘하는 우군 52만 8쳔명, 수양제가 직접 이끄는 중군 26만 4천명 이렇게 탁군에 집결한 수나라 군사는 모두 132만명!!
이들은 다시 두갈래로 나뉘어, 육군 백만은 요하쪽으로 수군 10만은 동래지역으로 향했다.
수나라의 군사들이 모두 출발하는데에는 총 40일이 걸렸고,그 길이도 서울과 부산 거리인 432 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최대의 원정이었다.
588년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한다. 400년간 계속되던 분열과 혼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드디어 중국 땅에 통일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 후에 수나라는 주변의 이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해서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는 중화사상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수나라의 동쪽엔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지도 않았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단지 이렇게 도도한 고구려를 혼내주기 위해서 수나라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일까?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한 고분 벽화는 무척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이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의 진이란 사람이다. 그가 유주지역의 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열세명의 부하태수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데 그 태수들의 지역이 벽화속에 정확히 기록 되어 있다. 과연 이 열 세 지역은 지금의 어디일까 ? 벽화에 기록된 열 세지역은 놀랍게도 모두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이것은 5세기 초 고구려가 중국의 북경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성했다는 증거였다. 이때 고구려가 이렇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이 대단히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5호 16국시대라고 그러는데 북방 이민족들이 남하해서 왕조를 세웠다가 망하고 단명한 왕조들이 자주 바뀌는 그런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충분히 고구려가 중국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겄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을 어떻게 불렀을까?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함경남도의 한 절터에서 발견된 고구려시대의 금동판에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적혀 있다.
'천손 ,하늘의 자손'태왕, 사해, 천손과 같은 말들은 바로 고구려가 천하를 지배하는 중심국가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국 고구려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이었고, 이런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중국의 천하는 서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것이다.이것이 수나라가 전쟁을 일으킨 한가지 이유였다.
그런데 고구려 수나라 전쟁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중국 요서지방의 조양시는 인구 80만의 자그마한 도시다. 하지만 1300년전 이곳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제시장이 들어선 무역의 중심지였다. 당나라는 당시 이 지역을 차지했다는 표시로 80머터 높이의 거대한 탑을 세웠다. 요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을 차지한 거란족은 82미터 높이의 탑을 세웠다. 요나라의 영토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이런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북방의 이민족, 중국, 한반도, 일본 그리고 중앙아시아상인들까지 대거 모여들었던 이 노른자 땅이 6세기 말경에는 바로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 중국의 역사서 신당서는 조양의 옛 지명인 유성에 고려시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 유성에서 고구려는 북방민족에게 농산물이나 철을 수출하고 말과 가죽류를 수입했다. 중국과는 말, 황금, 화살 등을 수출하고 비단 장신구 등을 수입 했다. 중개 무역권도 고구려가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무역은 동북아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몽고고원에서 발견 되었다. 돌궐이 세운 비석에는 552년, 고구려에서 사신이 다녀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사신들은 널리 중앙아시아까지 왕래 하고 있었다.외교는 무역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고구려의 무역은 해상을 통해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서기 438년 고구려는 800필의 말을 남송으로 수출한다.당시 고구려는 황해의 해상권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거대한 시장권과 교역권,이것이 바로 고구려 수나라전쟁의 또다른 이유였던 것이다.
북방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쌓았던 중국의 만리장성은 수나라가 들어서기까지 오랫동안 버려진 채 훼손되어 가고 있었다.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수양제는 이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대공사를 벌인다. 이 공사에 동원된 장정만도 백만명에 이르렀다. 수양제로서는 고구려 정벌에 앞서 변방의 수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607년 수양제는 대대적인 신무기 개발을 명령한다.
소차는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이면서 성안의 동태를 살피는 정찰용 차량이다.
그리고 전호피차는 성벽 가까이에 접근해서 땅을 팔수 있도록 만든 장갑무기이다. 터널을 만들어서 성안으로 몰래 진입하려 한 것이다.
포행차라는 이름의 무기도 있었다.
발석차라고도 하는데 수백가닥의 줄을 한꺼번에 잡아당겨서 거대한 돌을 날려보내는 무기다.
운제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높은 성벽을 오르기위해 40미터의 사다리를 펼칠 수 있도록 고안한 무기다.
당차라는 강력한 무기도 개발됐다. 당차는 거대한 쇠망치를 앞뒤로 흔들어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한다.
또 수십명의 군사가 함께 싸울 수 있는 팔륜누차도 개발했다.
출정에 앞서 등주성 일대에서도 대대적인 전쟁준비가 이루어졌다. 고구려 침공을 위해서는 해군의 공격이 필수적이어서 수양제는 엄청난 수의 전선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전국의 조선 기술자를 이곳 산동으로 집결시켜서 맨처음 500척 이상의 큰 선박을 건조하였다. 오층 누선-최고 천명의 군사를 태울 수 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군함이었다. 이렇게 만반의 전쟁준비를 마치고 수나라 군사들은 의기양양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
고구려의 백암성. 천3백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았건만 지금도 백암성은 장엄한 옛 모습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성이었다. 수나라가 가공할만한 무기를 만든것도 모두 고구려의 성을 넘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고구려의 성은 어떤 위력울 가진 것일까?
구릉지역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백암성은 가장 높은 곳에 총 지휘소인 장대를 설치했다. 성내부는 반구릉지대로 한쪽면은 태자하를 끼고 있고 그 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백암성의 다른 한쪽은 200미터 높이의 까까지른 절벽이었다. 고구려의 성은 이렇게 최대한 자연지형을 이용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성은 축성법도 독특했다. 성벽아래는 마치 계단처럼 차곡차곡 안으로 돌을 들여 쌓고 있었다. 성벽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성벽을 넘어오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 성은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치. 백암성은 60미터 간격으로 거대한 치가 설치돼 있는데, 치의 간격은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정확히 계산한 것이다. 치가 설치된 성에서는 세방향에서의 공격이 가능하다. 성문 진입이 어렵다는 점도 고구려성의 특징이다. 성문은 반원형 성벽으로 감싸여 있고, 그안에 들어온 적군은 꼼짝없이 갇힌채 화살공격을 받게 된다. 고구려인들의 무기는 또 무엇이 있을까? 요동제일의 전망을 자랑하는 비사성. 1300년전,고구려는 바로 이곳에서 저 멀리 바다로 진격해 오는 수나라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612년 4월 수나라의 백만대군은 요하를 건너 고구려의 요동성으로 진격했다. 당시 요동성은 성안에 50만석의 군량미를 비축해 놓고 수나라 백만대군의 발목을 3개월째 잡았다. 요동성 함락에 실패한 수양제는 별동대 30만을 조직해서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략한다. 바다로 진격하는 수군과 합동작전을 펴게 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수군은 비사성을 중심으로 수나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한다.수나라의 별동대는 식량보급이 없는 상태에서 진격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별동대를 물리치기 위해 유인작전을 펼쳤다. 고구려군은 미리 살수의 강상류에 둑을 쌓고 수나라군이 건너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7월 초순 유인작전에 말려든 수나라군은 살수를 건너 평양으로 진격했다.그러나 식량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수나라군은 오래버티지 못하고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때 맞춰 고구려군은 미리 쌓아둔 둑을 무너뜨리고 수나라군의 허리를 끊었다. 그리고 고립된 수나라군의 선두와 후미에 총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패주하는 수나라 군사를 쫓아 고구려군은 압록강까지 추격해 들어갔다.이 공격에서 살아 남은 수나라 군사는 거의 없었다.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한 후,수나라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이런 반전가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長侵天半 輪刀耀日光 긴 창은 하늘을 덮고 칼과 전차는 햇빛에 번쩍이네
上山吃獐鹿 下山吃牛羊 산위에서는 사슴과 노루를 잡지만 산아래에선 소와 양을 잡는다네
당시 수나라 백성들은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이렇게 표현 했던 것이다. 이 노래가사처럼 수백만의 원혼을 만든 전쟁에서 결국 수나라는 졌다. 그렇다면 패자인 수나라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수양제의 궁궐은 모두 차 밭으로 변해 있다. 문이 있던 자리에는 길이 들어서 버렸다. 깜쪽같이 사라진 궁궐처럼 어쩌면 중국인들에게 수양제는 잊고 싶은 역사의 인물인지도 모른다. 고구려와의 전쟁에 실패한 후 수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그런와중에서도 수양제는 궁궐 100여개의 방에 미녀를 데려다 놓고 호위호식을 즐겼다고 한다.
전쟁에 패한지 4년 뒤인 618년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군 사령관 우문술의 아들에게 피살당한다.
'우리나라와 귀국은 각자의 영토를 잘 보전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니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수나라가 귀국을 침공하여 피해 를 입히고 우리또한 피해가 크니 그것이 양국의 우호에 장애가 될까 두렵습니다. 먼저 당에 있는 귀국의 포로를 송환하오니 귀국에서도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삼국사기)
전쟁으로 국력이 쇄한 중국은 이렇듯 먼저 화해를 요청해 왔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명실상부한 패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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