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구려 유민 2세 '고선지'

친가유 2009. 4. 4. 05:50

고구려 유민 2세 '고선지'

 

 

 

실크로드가 번성해썬 시기, 중앙아시아에는 동양과 서양의 중개무역으로 富를 축적했던 나라 석국(石國)이 있었다.  구 소련연방에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가 바로 석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석국은 750년 이민족듸 침략으로 왕은 살해되고, 도시전체가 잿더미로 변했다. 옛 왕궁의 잔해는 그 침공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현장의 성벽 중간츠에는 아직도 당시의 불탄 재가 손에서부스러지고 있었다. 현지 고고학자 부르야코프박사는 이 재가 바로 750년 침공의 흔적이라고 증언한다. 실크로드의 한 국가를 이렇게 폐허로 만든 침략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 장본인은 바로 고구려 출신의 장소 '고선지'였다. 그는 어떻게 머나먼 중앙아시아까지 오게 됐으며, 왜 한 국가를 이렇게 잿더미로 만든 것일까?

 

국내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는 고선지 관련 문서가 발견됐다. 이 문서는 중국 신강성 투르판 지역의 고선지 부하였던 장무가의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현재는 중국신강성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이 문서에는 고선지가 중앙 아시아를 침공했던 사실을 담고 있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고선지 원정의 루트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문서의 제작연도는 751년 바로 고선지의 석국 침공 다음해였다.

 

빙하로 덮여있는 해발 4580미터의 고개는 고선지의 부하들이 더 이상 전진을 거부했던 곳이다.20세기초 이 고개를 실제 등반한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대탐험가인 스타인은 여기에서 바로 "고선지 원정은 나폴레옹의 알프스원정을 능가한다"라고 기술했다. 그의 방대한 저서 곳곳은 고선지의 원정에 대한 찬사로 채워져 있기도 하다. 현지인 조차 고산증에 고통받아 등반이 지연되던 이곳을 고선지는 일만(一萬)의 기병을 이끌고 넘었던 것이다.

 

중국 사서가 당나라 장수로 활약했던 고선지를 고구려인으로 기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고구려 유민 2세였다.

 

보장왕 등 20만명을 당으로 끌고갔다. - 삼국사기 - 고구려 포로들은 사막의 마을에 배치됐다. - 구당서 -

고선지 가문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곳은 바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중국 서부 감숙성의 '무위'라는 도시다. 고비사막과 이어지는 곳이다.

 

나라가 망했어도 끝까지 당에 대항했던 고구려 유민들이 두려워 唐은 이들을 사막으로까지 끌고 갔다. 하지만 고구려인의 끈질긴 생명력은 그 후손에게로 이어졌던 것이다. 강제로 사막으로 끌려가고 다시 당의 변방을 지키는 병력원으로 이용되던 고구려인들 중 두각을 나타낸 고선지일가. 고선지는 몇 차례의 대원정을 성공하자 747년 드디어 당시 당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지역을 통치하던 안서대도호부의 안서절도사에까지 오른다. 포로의 아들은 실크로드의 천산남로, 천산북로, 서역남로의 세 길을 모두 장악한 실크로드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서기 751년, 동진하던 이슬람제국의 30만 호라산군대와 중국의 고선지군이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패권을 두고 카자흐스탄공화국 탈라스평원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세계전사에 중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한 대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탈라스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5일간의 전투, 그러나 고선지는 예하 돌궐족의 반란으로 처음으로 패배했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서역이 이슬람권으로 굳어진 것이 바로 이때의 고선지의 패배로 인한 것이다. 고선지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당시의 중앙아시아지역으로 한번도 진출해 보지 못했다. 그러나 탈라스전투의 여파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크게 일어났다. 이때에 중국의 제지술이 최초로 서방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고선지의 부하 중 제지술의 장인이 아랍 연합군에게 잡혔고, 실크로드의 도시 사마르칸트에 그해 제지 공장이 세워졌다. 사마르칸트에서 바그다드로 제지술은 전파되고 아랍은 제지술을 유럽으로 전파한다. 독일과 영국까지 제지술이 전파된 것은 14세기이다. 제지술 전파는 곧이어 르네상스의 믿거름이 된다. 유럽이 중세암흑기를 벗고 문예부흥기로 들어간 르네상스의 시작시점은 바로 14후반으로 세계사는 말하고 있다.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글을 쓰고 있던 서방은 비로소 종이 문명을 접하게 된 것이다. 고선지의 패배는 아랍과 서양의 학문을 일으키고 오늘날의 서양 종이 문명이 있게 한 밑거름이 된 문명사의 대전기였다. 세계문명사를 뒤흔든 종이전파의 시작이 바로 고선지의 탈라스전투인 것이다.

 

서양의 학계는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로 더 유명한 알프스 원정의 나폴레옹보다 떠 뛰어난 전략가로 고선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사람들의 평가는 냉혹하다. "고선지가 우리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은 아니지 않는가?", "잔인하고 탐욕스런 장수였다"는 것이다.과연 어떤 평가가 "고선지"의 자리 매김일까?당나라의 장수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연구조차 없었던 "고구려 2세". 그가 바로 '고선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