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 태조 주원장은 고려출신

친가유 2014. 11. 13. 17:40

명 태조 주원장은 고려출신


 


 


 

명(明)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1368년~1398년 제위)의 황후(皇后)는

 

고려인 '한영정(韓永정)'의 딸이며 '한확(韓確)'의 누이 '한(韓) 여비(麗妃)'였다.

 

한 황후는 명 제3대황제 영락제(永樂帝)의 어머니이다.

 

또한 한 황후의 동생 한계란(韓桂蘭)은 제5대 선덕제의 황후가 되었으니

 

'한확(세조 때 명신)'은 두명의 누이동생이 명나라 황후가 된 샘이다.

 

주원장이 고려사람이라는 사실은 또 있다.

 

주원장이 명 태조로 즉위하기 전에

 

이미 고려여인 석비(碩妃)가 있었는데

 

석비는 명나라 함산공주(含山公主)의 어머니가 된다.


 

<주원장의 출생설화에 대하여>

 

경상도 금오산 숭산(崇山)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적인 설화(說話)에 의하면,


"금오산(金烏山)은 금가마귀 삼족오(參足烏)가 살고 있는 태양산으로서,

이 산의 남쪽에서 앞으로 3명의 의인(義人)이 태어나는 동방의 길지(東邦吉地)다.

그 의인 중 한사람이 명나라를 건국한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다.

 

주원장은 금오산 남쪽 골짜기의 가난한 주씨(朱氏)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5살에 스님을 따라


청송 주왕산 어느 절로 가서 탁발승이 되었다.

어려서 부터 민첩하고 영특한 주원장은 15살에 속세로 나왔고 전국을 방황하다가

17세에

산적에게 잡혀 노예로 원나라에 팔려갔다.

원나라에 팔려간 주원장은 홍건적의 졸개가 되었고,

 

함께 노예로 끌려간 고려사람들과 목숨을 걸고 용맹하게 싸웠고,

 

큰 공을 세운 주원장은 홍건적 두목의 사위가 되었다.

 

그 후 주원장은 반란군의 제 2인자가 되었고,

 

드디어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워 명태조가
되었다."

 

이상은 경상도 금오산 숭산(崇山)마을 노인들이 전해오는 전래설화이다.

 

지금도 이곳 촌노(村老)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곳 숭산 금오산 자락에는

 

고려왕자 대각국사 의천이 기거하던 '선봉사'가 있는 '동방길지'로서,

 

금오산 남쪽자락에서 출생할 3명의 의인은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을 첫번쩨 의인으로 알고,

 

한국의 5,000년 가난을 물리쳐 부국으로 만든 박정희 대통령이 두번쩨 의인으로 알며,

 

앞으로 3번쩨 의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洪武帝 朱元璋]


 

얼마 전 한,중 사학자들 사이에 '주원장의 출생'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상당수의 한,중학자들이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의 역사학자 '백린'은 [조선기문]에 기록된 설화를 근거로 들었다.

 

[조선기문]에는 명태조 주원장이 등장한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고 적혀있다."

 

또 한국 민간전설집에는 주원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적혀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했다.

반면 중국학자들은 역사학자 '오함'이 쓴 주원장의 전기 [주원장전]을 들어

 

주원장의 고려인설은 터무니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주원장전]에서는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출신으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16세에 고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기근을 피하기 위해 봉양현에 있는 황각사(皇覺寺)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어

하북지방 일대에서 탁발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은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에 실린 탄생설화를 보고 만들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오함의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이 발행된 뒤에 만들어 젔기 때문이다.

 

 

이 두 책에서 서로 일치하는 점은,

 

주원장의 출생과 매우 가난한 어린시절,

 

주원장이 5살에 절에 들어갔다는 점,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떠돌아다닌 시기가 15세~17세가 거이 일치한다.


주원장이 명태조가 된 그 후까지 그의 주변에는 유독 고려인이 많았다.

 

주원장의 여인들은 물론 환궁의 환관들과 궁여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고려인으로 체워졌다.

 

그의 심복인 '추유'까지도 고려인으로서 각별히 신임했다.

 

그 때문에 주원장은 한족(漢族)의 미움을 삿고

 

주원장은 한족대신들을 거의 다 죽이고 정치, 군사, 경제를 친정하기도 했다.

 

또한 주원장의 아들 제3대 명황제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 한(韓) 여비(麗妃)로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이러한 주원장의 부인들에 대해서 중국의 사학자들은

 

고려의 공녀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아직까지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고려 공여설'은 어처구니없는 모순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명나라 건국이 1368년인데,

 

3대 명황제 영락제(永樂帝)는 1360년 출생이니,

 

명나라가 개국하기 8년 전에 이미 태어났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반란군 홍건적 토벌에 2천여 고려군(이성계의 려,원 연합군)을 파병
상황인데,

 

어떻게 반란 홍건적 소 두목인 주원장에게 고려여인을 공녀를 보냈겠는가?

 

더구나 영락제가 출생한 1360년은

 

장사성(張士誠), 진우양(陳友諒)의 홍건적 거대세력이 있었던 때다.

 

당시 주원장은 별로 드러 나지도 않던 작은 무리였을 뿐인데,

 

고려조정에서 조공 공녀를 받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제3대 명황제 영락제는 후에 티벳, 베트남, 남만주 등을 평정하여

 

명나라 최대의 영토를 넓히고,

 

환관 '정화'를 시켜 6회에 걸쳐 멀리 아프리카까지 정복하였으니,

 

지금까지 중국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황제였다.

 

또한 주원장은 명나라 개국시기부터 한족 대신들과 환관들을 믿지 않었다.

 

주변에 많은 고려인들을 측근으로 두고 그들과 국사를 논하였다.

 

그 이유로 한족들의 조롱과 비웃음이 심해지자 한족 대신들과 수많은 한족을 학살하였다.

 

그래서 주원장을 중국역대 황제들 중에 가장 포악한 황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고려를 무서워 했던 주원장은 고려를 뒤집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를 신임했고,

 

조선에서 많은 환관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해 명나라 궁궐을 조선인들로 채웠다.

 

 

[참고] 명나라 (1368-1644), 276년.

 

제1대 태조 홍무제 주원장 (1368-1398), 30년 재위.
제2대 건문제 주윤문 (1398-1402), 4년 재위.
제3대 성조 영락제 주체 (1402-1424), 22년 재위.
제4대 인종 홍희제 주고치 (1424-1425), 1년 재위.
제5대 선종 선덕제 주첨기 (1425-1435), 10년 재위.
제6대 영종 정통제 주기진 (1435-1449),14년 재위.
제7대 경태제 주기옥 (1449-1456), 7년 재위.
제8대 영종 천순제 주기진 (1457-1464), 7년 재위.
제9대 헌종 성화제 주견심 (1464-1487), 23년 재위.
제10대 효종 홍치제 주우당 (1487-1505), 18년 재위.
제11대 무종 정덕제 주후조 (1505-1521), 16년 재위.
제12대 세종 가정제 주후총 (1521-1566), 45년 재위.
제13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1566-1572), 6년 재위.
제14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 (1572-1620), 48년 재위.
제15대 광종 태창제 주상락 (1620), 원년 재위.
제16대 희종 천계제 주유교 (1620-1627), 7년 재위.
제17대 의종 숭정제 주유검 (1627-1644), 17년 재위.


 

만주의 건주여진(建州女眞) 누르하치(Nurhachi, 奴爾哈齊)에 의해 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