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사~만주국 황제 푸이(1)

친가유 2014. 10. 25. 18:07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사

만주국 황제 푸이(1)

 

 

 

 

자금성 쫓겨난 마지막 황제, 일본 환대에 “천황 만세”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김명호 20140810 입력  

 

일본 육군대학 시절의 푸제(앞줄 왼쪽 두번째)와 룬치(왼쪽 첫번째). 앞날을 예측이라도 한듯, 표정이 심란해 보인다. 1943년 4월 23일 도쿄. [사진 김명호]

 

푸이(溥儀·부의)는 퇴위한 후에도 13년 간 자금성에 거주하며 황제 존호(尊號)를 유지하고 있었다. 1924년 10월 23일, 서북 군벌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의 군대가 베이징을 점령했다. 총통 차오쿤(曹錕·조곤)부터 잡아가두고 국회를 소집했다. “황제 칭호를 영원히 없앤다. 푸이에게 평민 자격을 부여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를 일본이 유혹했다. 궁지에 몰린 푸이는 일본이 내미는 손을 덜컥 잡아버렸다. 두 명의 부인과 유모, 동생들을 데리고 베이징 주재 일본 공사관에 잠입했다.

일본은 푸이에게 정성을 다했다. 푸이의 옛 신하들에게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냉철하고 근엄한 당대의 명망가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의 힘을 이용하면 다시 황위에 오를 수 있다”며 푸이를 부추겼다.

푸이도 일본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동생들을 모아놓고 일본 칭찬 하는 날이 많았다. 황후 완룽(婉容·완용)이 기모노를 입고 나타나도 탓하지 않았다. 친동생 푸제(溥杰·부걸)가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 가깝다는 이유로 동북 강무당(講武堂)에 입학하려 하자 만류했다. “동북에는 절대 가지 마라. 장쉐량은 흉악한 놈이다. 언제 우리를 죽일지 모른다”며 푸제와 처남 룬치(潤麒·윤기)에게 일본 유학을 권했다. “일본에 가서 군사학을 배워라. 일본이 싫으면 영국으로 가라. 나도 영국 유학을 갈 생각이다. 영국 왕자도 내게 오라는 편지를 여러 통 보냈다.”

 첫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룬 푸제와 일본인 부인. 연도 미상.
일본은 푸이에게 더 안전한 곳을 물색했다며 톈진행을 권유했다. 톈진에는 일본조계가 있었다. 1925년 2월 23일, 푸이는 톈진 주재 일본 총영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패전후 총리가 됐다)와 공관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톈진행 열차에 탑승했다. 이튿날 순천시보(順天時報)에 푸이의 근황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전 선통황제가 베이징을 떠났다. 동생들도 오늘 아침 톈진행 열차를 탔다. 한동안 톈진에 머물 것으로 추측된다. 최종 행선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톈진에 도착한 푸이는 날이 갈수록 일본을 신뢰했다. 자신을 다시 황제 자리에 앉힐 외부세력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훗날 회고록에서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총영사 요시다는 신하처럼 정중했다. 하루는 일본인 소학교를 참관하자고 청했다. 거리에 늘어선 일본학생들이 깃발을 들고 나를 반겼다.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오랫만에 들어본 만세소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톈진 주변에서 군벌들간의 내전이 극에 달했을 때도 요시다는 푸이의 근심을 덜어줬다. 주둔군 사령관과 함께 전황을 보고했다. “황제께서는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조계내의 각국 주둔군들이 연합군을 조직했습니다. 중국 군대는 한 발자국도 못 들어옵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첫 번째 내방객은 일본 공관원들이었다. 생일날도 푸이의 거처에 떼로 몰려와 만세를 부르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일본측의 환대에 푸이도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천장절(일왕의 생일)이 되면 기념식에 참석해 ‘천황 만세’를 불렀다. 대본영에서 왔다는 일본군 참모의 중국사정 분석은 푸이를 흥분시키고도 남았다. “중국의 혼란은 황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중국의 민심을 하나로 할 사람은 선통황제가 유일합니다.”

푸이는 푸제와 룬치를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푸제는 부인 탕스샤(唐石霞·당석하)에게도 알리지 않고 일본으로 떠났다. 상하이에 머물던 탕스샤는 소식을 듣자 입에 거품을 물었다. “한때 황제와 황제의 동생이었던 사람들이 꼴 좋다. 다시는 저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겠다”며 온갖 남자들과 어울렸다. 단, 일본인들에게는 눈길도 안 줬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이 동북을 점령했다. 일본 군부는 동북을 중국에서 떼어내기로 작정했다. 중국에 와 있던 특무기관원과 군인들을 동원해 푸이를 동북으로 이전시켰다. 푸이를 만주국 황제에 앉힌 일본 군부는 푸제를 일본 귀족의 딸과 결혼시켰다. 정략 결혼이었지만 푸제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일본 군부는 푸이와 푸제를 이간질시켰다. 만주국 제위계승법(帝位繼承法)을 발표했다. 푸이의 의심벽이 발동했다. 의심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푸이는 유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푸제도 예외일 수 없었다

 

“제수는 나를 독살하려는 일본 밀정” 전전긍긍한 푸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김명호 20140817 입력  

 

만주국 황제에 취임하기 위해 뤼쑨(旅順)을 떠나기 직전의 푸이(오른쪽 둘째) 형제와 황후 완룽 남매. 1931년, 겨울. 완룽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자 일제는 푸이도 일본 여인과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눈치를 챈 푸이는 서둘러 탄위링을 귀인으로 맞이했다. [사진 김명호]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溥儀·부의)가 톈진의 일본 조계에 거처를 정하자 옛 신하(遺老)들이 몰려들었다. 한결같이 후사(後嗣)를 걱정하며 부인 감을 물색했다. 푸이의 생부 자이펑(載灃·재풍)은 자식의 결함을 잘 알았다. “소용 없다”며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말렸다.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자 다들 뜻을 접었다.

푸이는 황후 완룽(婉容)을 비롯해 5명의 부인이 있었다. 소생이 없다 보니 성 불구자, 호모 등 별 소문이 다 나돌았다. 마지막 부인이었던 리수셴(李淑賢·이숙현)의 구술에 의하면 호모는 아니었다고 한다.

푸이를 만주국 황제에 앉힌 일제(日帝)도 푸이의 신체적 결함을 알고 있었다. 후작의 딸 사가 히로(嵯峨浩)와 푸제(溥杰·부걸)의 결혼을 추진했다. 덕혜옹주와 가쿠슈인(學習院·학습원) 시절 한 반이었던 사가는 괜찮은 여자였다.

일본 관동군은 푸제와 탕스샤(唐石霞·당석하)의 이혼부터 서둘렀다. 상하이에 있는 탕스샤를 수소문했다. 소재가 파악되자 회유에 나섰다. 정보참모가 거금을 들고 탕스샤를 찾아갔다. 탕스샤는 회유할 필요가 없었다. 이혼 소송 서류를 내밀자 낭랑한 목소리로 “不敢請 固所願(불감청 고소원)”, 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바라던 바라며 맹자(孟子)의 한 구절을 읖조렸다. 말이 부부지, 청나라 황실과는 남이 된지 오래라며 선뜻 도장을 찍어줬다. 금품도 거절했다. “중국인 난봉쟁이들 등 처먹는 게 떳떳하다. 일본인이 주는 돈은 받지 않겠다.”

일제가 푸제와 일본 여인의 결혼을 획책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푸이도 앉아만 있지 않았다. 만주 귀족의 후예 중에서 제수 감을 물색했다. 문제는 푸제였다.

푸제는 사가에게 한눈에 반했다. 사가도 푸제를 좋아했다. 푸제 얘기만 나오면 얼굴을 붉히며 방으로 뛰어들어가 콧노래를 불렀다. 푸제는 푸이의 만류를 한 귀로 흘려버렸다. 1937년 4월 3일 도쿄의 군인회관에서 사가와 결혼식을 올렸다.

1년 후, 일본 관동군은 푸이를 압박해 만주국 제위계승법에 서명을 받아냈다. “만주제국의 황제는 강덕(康德·푸이의 연호)황제의 아들과 손자가 대를 이어 계승한다. 장자계승을 원칙으로 한다. 장자가 없을 때는 장손이 계승한다. 장자와 장손이 없으면 차남과 그 자손이 계승한다. 황제에게 아들과 손자가 없으면, 형제와 형제의 자손들이 계승한다.”

뭇솔리니와 히틀러가 만주국을 승인하자 푸이는 의기양양했다. 만주국 황제의 대를 이을 황태자를 보겠다며 여인을 물색했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17세 소녀 탄위링(譚玉齡·담옥령)을 귀인(貴人)에 봉했다.

 

        푸이가 찍은 탄위링. 연도 미상.

푸이는 탄위링을 총애했다. 푸이의 내면세계만 연구한 사람이 재미있는 분석을 한 적이 있다. “남자들은 좋아하는 여자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한다. 푸이는 촬영을 좋아했다. 평생 수 천 장의 사진을 찍었다. 직접 찍은 탄위링의 사진이 33장 남아 있다. 황후 완룽의 사진은 8장에 불과하다. 이 점만 보더라도 푸이가 탄위링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1942년, 탄위링이 병으로 죽자 일본인이 독살했다고 굳게 믿었다. 마지막 황제는 죽는 날까지 탄위링의 사진을 품고 다녔다.”

푸이는 사가와 함께 나타난 푸제를 경계했다. 사가가 자신을 독살하기 위해 일본이 파견한 첩자라고 단정했다. 푸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은 동생들과 식탁을 마주했다.

 

사가는 요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항상 새로운 요리를 한 가지씩 들고 왔다. 푸이는 푸제가 먹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젓가락을 댔다. 탄위링과 여동생들에게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가가 만든 음식에 독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푸제가 먹기 전에는 절대 먹지 마라.” 푸제가 빠지는 날은 갑자기 속이 불편하다며 배를 부둥켜 안았다. 여동생들에게 한 눈을 찡긋하고 일어섰다.

사가가 임신하자 푸이는 초조했다. 푸제를 불러서 화를 냈다. “네 처는 일본 밀정이다. 관동군은 일본인 혈통을 만주국 황제에 앉히기 위해 너를 일본여자와 결혼시켰다. 네 아들이 태어나면, 나는 독살 당하고 너도 온전치 못하다. 애를 유산시켜라.”

푸제는 형의 말을 거역했다. 사가를 푸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사가가 딸을 순산하자 푸이가 가장 반가워했다.

소련 포로된 푸이 “거창한 이념은 사람 홀리는 도구일 뿐”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김명호 20140824 입력  

 

 

만주국 황제 시절, 일본군과 만주국 대신들에게 둘러쌓인 푸이(계단 가운데 안경 쓴 사람). 1933년 가을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 지금의 長春). [사진 김명호]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한 소련은 관동군 사령관에게 비밀문건을 보냈다.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푸이)를 우리측에 인도해라. 장소는 선양 비행장, 시간은 8월 17일 정오. 착오 없기 바란다.”

1945년 8월 16일, 압록강 인근의 폐광 창고에서 만주국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퇴위를 선언한 푸이는 공포에 휩싸였다. 훗날 회고록에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만주국 황제 시절, 일년에 한 번씩 관동군의 안배로 지방을 순시했다. 한번은 옌지(延吉)의 조선족 지구를 둘러본 적이 있었다. 전용 열차가 지나는 곳마다 일본 헌병과 만주군들이 넘쳐났다. 수행한 관동군 장군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토비들 때문이라고 했다. 토비가 뭐 대단하기에 이렇게 많은 병력이 필요한지 의아했다. 이 지역의 토비는 거의가 공산당이라는 설명을 듣자 이해가 됐다.”

푸이는 잠시도 폐광마을에서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여자들을 떼어놓고 선양으로 향했다. 일년 후 황후 완룽(婉容·완용)이 옌지의 감옥에서 병사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선양 공항에 도착한 푸이 일행은 소련군과 조우했다. 동행했던 공친왕(恭親王)의 손자가 기록을 남겼다. “일행은 푸제(溥杰·부걸)와 처남 룬치(潤麒·윤기), 경호실장, 주치의 등 모두 9명이었다. 소련군은 휴게실에 차와 간단한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우리의 포로다. 지금 이 순간부터 소련군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했지만 태도는 정중했다. 의심이 많은 푸이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먹기를 마치자 비행기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붉은 별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소련 비행기였지만 자세히 보니 미국의 더글라스가 만든 항공기였다. 뭐가 뭔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신해혁명 이후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관동군이 우리를 소련측에 팔아 넘겼다는 확신이 들었다. 앞으로 무슨 피곤한 일들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농촌 풍경은 평화로웠다.”

 저우언라이(周恩來·오른쪽)는 푸이를 각별히 챙겼다. 1960년 1월 22일, 베이징 정치협상회의 접견실. 맨 왼쪽은 푸이의 숙부 자이타오(載濤).
푸이의 첫번째 기착지는 치타(러시아 남동부 도시)였다. 공항에 도착하자 중국인이 다가왔다. 푸이는 깜짝 놀랐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나를 인수하러 보낸 사람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중국계 소련인이었다. 세상천지에 중국인이 없는 곳은 없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포로생활은 그런대로 지낼만했다. 철조망 안이었지만 단독건물에 거주하며 중국에서 함께 온 일행들의 시중을 받았다.”

소련측은 푸이의 수중에 엄청난 보물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증받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럴 때마다 푸이는 조상들이 남긴 유물이라며 딱 잡아뗐다. 대신 수용소 소장이나 지역 사령관에게 비누와 치약을 자주 선물했다. 푸이의 선물을 받을 때마다 사령관과 소장은 희희낙락했다. 말이 비누나 치약이지 그 안에는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푸이는 소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본론』과 레닌의 저술들을 구입했다. 포로로 끌려온 만주국의 대신·장군들과 학습반을 만들었다. 특히 『소련 공산당사』는 밑줄까지 그어가며 열심히 읽었다.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동생 푸제를 붙잡고 푸념했다.

“아무리 거창한 이념이나 소신도 결국은 다수를 홀리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인간세상도 동물세계와 다를 바 없다. 먹고 먹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그간 우리는 허구헌날 먹히기만 했다. 혁명파들에게 먹혔고,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와 장제스, 일본군에게 먹혔다. 지금 중국은 내전 중이다. 누가 이기건 우리는 살아남기 힘들다. 당장은 소련이 가장 안전하다. 소련은 영국·미국과 맹방이다. 이곳에 머무르다 기회를 봐서 미국이나 영국으로 가자. 지금 내 손에는 엄청난 귀금속이 있다. 이것만 있으면 나머지 삶은 걱정 안 해도 된다. 유모와 동생들까지 불러서 편하게 살자. 네 처는 일본 여인이라 안된다.”

푸이는 혼자 남은 유모가 자살한 줄을 몰랐다. 푸이는 스탈린에게 “소련에 머물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장제스를 저울질하던 스탈린에게 푸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푸이의 송환을 요청하자 스탈린은 승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