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페셜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펀글)
역사스페셜
만주대탐사 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1908년 중국 청나라 선통황제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역사에 마지막 항제였다.
중국 혁명 후 그는 친일 전범자로 법정에 선다(1959년 중국 푸순 전범 재판소).
황제의 본명은 아이신줘러 푸이였다. 아이신줘러, 아이신줘러.
아이신줘러. 즉 애신각나. 이것은 청 황실의 성씨입니다. 성이 꽤 길죠. 그런데 이 아이신줘러에는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중국 동북아를 꿰뚫는 역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골타와 누르하치, 이 이름들을 기억하십니까?
아골타는 여진족으로 1115년 금나라를 세운 금 태조이고요,
누르하치는 또한 여진족으로 후금, 그러니까 청나라를 세운 청 태조입니다.
오늘 우린 그동안 북방 오랑캐 정도로만 여겨져 왔던 여진족 혹은 만주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역사 속의 비밀을 풀어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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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펑은 중국 역사상 가장 문화가 발달했던 송나라의 수도였다.
천백 년대, 카이펑은 인구 50만의 국제 도시였다. 로마나 유럽의 도시들이 인구 4, 5만의 불과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국제도시 카이펑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청명상하도. 당대 최고의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화려한 카이펑 시가를 그려 송황제 휘종에게 바친 중국의 보물이다.
넘치는 물산과 활기찬 수도 카이펑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광적으로 예술을 사랑했던 휘종 황제 후원아래 문인 예술가들은 절정의 중국 문화를 표현했다.
그러나 카이펑의 치욕적인 한족의 역사가 서려 있다.
천백 년대, 중국 송나라는 북방민족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만주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만주에 살던 여진족도 거란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 중 거란족에 직접 지배를 받던 여진족을 숙여진이라 하고 송화강 동쪽에 거주하며 거란의 간접 통치를 받던 여진족을 생여진이라 했다. 중국 하얼빈 인근 송화강 유역에서 유목과 농경을 하던 완안 여진족도 거란의 간접 지배를 받던 생여진 중 하나였다.
일찍부터 북방에선 ‘여진족이 일만 명 뭉치면 대적하지 말라’고 한 말이 있었다.
그래서 거란족은 철저히 여진족을 뭉치지 못하게 경계했다.
그러나 완안 여진족은 거란의 통제속에서도 서서히 힘을 결집하고 있었다.
1114년 일 만의 여진족이 요나라 십만 대군을 하얼빈 인근 출하점에서 대파하는 사건이 벌어진다(1114년 팔리성 전투).
하루 밤새 만주의 질서는 뒤집어졌다.
출하점 전투의 주역은 바로 완안 여진의 지도자 아골타였다. 1115년 아골타는 곧바로 금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다.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아골타는 한족의 북방 저지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바람처럼 남진한다.
금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황하를 건너 한족의 나라인 송의 수도 카이펑으로 밀려들었다.
놀란 송황제 휘종은 화친을 제의하지만 끝내 수도 카이펑은 금군에 점령당한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의 심장부인 중원을 이민족에게 내주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1127년 송나라 수도 카이펑 함락).
정강지변(靖康之變). 휘종과 흠종 부자는 여진족의 포로가 되는 참담한 신세가 됐다.
이것이 한족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 정강의 변이다.
왕우량 교수 / 중국 다렌대학
"1127년의 정강지변은 중국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북방민족, 즉 중국동북지방의 여진족, 작은 민족이 요국을 멸망시킨 후 다시 중국역사상 강대한 왕조인 송 왕조를 멸망시킨 사건입니다.
이때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의 통치자가 되고 북방민족이 북경을 기초로 정치통치 중심이 되는 기반을 닦습니다."
한족의 심장부를 점령한 여진 추장 아골타.
아골타는 금을 건국한 후 황실 성을 완안씨로 정한다. 금태조 아골타의 정식 이름은 완안 아골타다.
송을 정벌할 때 금나라 군부의 핵심 인물은 아골타의 넷째 아들 완안올출(完顔兀朮)이었다.
황제가 이민족에게 잡혀간 충격 때문에 정강의 변은 중국에서 영화나 드라마(‘팔천리로의 雲月’)에 단골
소재가 됐다.
완안올출도 주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진우주. 그런데 아골타의 아들 완안올출을 진우주 즉 우리말로 김올출로 부른다.
완안올출을 왜 김올출이라 부를까?
금나라 왕자의 성이 완안이 아니고 왜 김씨일까?
중국 서부 깊숙한 곳 감숙성의 경안현엔 뜻밖에도 완안 성씨의 여진족들이 동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직계조상이 금태조 아골타의 넷째아들 완안올출 즉 김올출이라 했다.
왜 금황족의 후손들이 만주와 정반대의 땅인 이곳에 살고 있을까?
아직도 가족공동체를 유지하며 척박한 환경 때문에 밭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현대식 집을 짓긴 했지만 감숙지방의 전통적인 주거 형식인 토굴생활도 병행하고 있었다.
오지의 정체를 숨긴 채 오천 여명의 완안씨들은 씨족 공동체를 이뤄 팔백여년동안 이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천백사십년대에 김올출 즉 완안올출의 아들이 금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살해되자 이곳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역대 금황실의 황제와 형제들을 그린 선인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완안 청베이 / 완안 올출 후손
"김올출은 금희종이 즉위하도록 돕고 해령왕을 배척했습니다.
희종이 황제가 되었지만 해령왕이 희종을 살해합니다.
해령왕은 희종을 죽인 후 김올출의 후손을 죽이려합니다.
김올출의 아들 완안헝은 해령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후손들도 완안올출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김올출이라 부른다.
명절이면 전부족이 모여 제사을 지내는 완안씨 사당엔 역대 황제와 자신들의 선조인 완안올출의 비가 있었다.
완안올출의 비에도 역시 김올출이라는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왜 자신들 선조의 성을 완안씨라 하지 않고 金씨라 부를까?
완안 청베이 / 완안 올출 후손
"학술계에서는 아직 확정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김올출의 성은 금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성이 김이고 이름이 올출입니다."
후손들도 오래전부터 그냥 김올출이라 불러 왔을 뿐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만주에서 감숙까지의 거리만큼이나 기나긴 역사의 비밀이 ‘쇠 금’자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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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주. 즉 김올출. 중국 금나라의 왕자가 김씨 성이라고 하니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김씨 성은 우리나라에서야 가장 흔한 성씨입니다만 중국에선 대단히 드문 성입니다.
중국 대륙에는 워낙 많은 왕조들이 흥하고 망해서 상당히 헷갈립니다.
잠시 중국과 만주의 역사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668년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30여년 후인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 옛 고구려 땅에 발해를 건국합니다.
그러다가 926년 거란족이 이 발해를 멸망시키는데요.
거란족이 요즘 우리가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볼 수 있는 요나라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이때 여진족은 요동에서 살고 있었는데요.
아골타라는 영웅이 등장하면서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금나라는 곧바로 한족의 나라인 송을 침략해 중원 대륙을 초토해 시키는데요.
이 한족의 본거지인 중원대륙은 이때부터 북방 이민족들에 의해 농락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아골타의 선조들이 상당히 흥미로운 사람들입니다.
강화도 마니산. 이곳엔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정기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이 개천각은 민족운동가였던 이유립 선생이 설립해 24분의 우리나라 위인을 모시고 있다.
환웅천제, 치우천황, 단군왕검, 고주몽, 대조영 등을 모시고 봄, 가을 두 번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엔 금태조 아골타가 모셔져 있다.
여진족인 아골타가 왜 우리나라 위인들과 나란히 모셔져 있을까?
구한말 역사학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박은식 선생은 금태조 아골타를 꿈에서 만났다는 ‘몽배금태조’라는 글을 남겼다. 그런데 이글에서 대금국 태조 황제는 우리 평주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역사학자가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중국 하얼빈 근교에 아청시는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회령부가 있던 곳이다.
제국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여진족 아골타는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아청엔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그런데 여진족의 전통가옥이 눈에 익다.
짚을 섞어 쌓은 흙벽과 가로지른 석까래는 우리나라 옛 시골집의 구조를 닮았다.
한켠엔 볏짚으로 이은 행랑채와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텃밭도 있다.
한족들의 가옥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구조다. 집 내부는 우리와 같이 온돌을 이용해 난방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가시간이면 모여서 전통방식의 겨루기를 즐긴다.
그것은 씨름이었다. 경기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씨름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 또한 한족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놀이다. 옛날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말도 문자도 잃어버리고 이젠 만족이라 불리는 여진족의 후예들.
이들의 조상인 금태조 아골타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베이징의 수도 도서관은 중국 최대의 도서관이다. 특히 이곳의 고문헌 자료실엔 각종 고서들이 보관돼 있다.
그런데 사서 중에 금황실의 가계를 기록한 송막기문이란 책을 볼 수 있었다. 여진족 금나라에 쫓기던 송은 양자강 건너 항적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포로도 잡혀간 황제의 귀환을 위해 1129년 금에 홍우를 파견했다.
송막기문은 남송의 홍우가 10년 동안 금나라에 머물며 기록한 당대의 생생한 증언이다.
그런데 송의 사신 홍우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여진 추장은 신라사람’. 뿐만이 아니다.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엔 자신들의 황실 뿌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형 아고네는 고려에 남고 둘째인 금해 시조와 동생 보할리는 여진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 금시조의 8대손이 태조 아골타다. 고려에서 온 금나라 시조 이름은 함보였다.
신라와 고려인이란 차이는 있지만, 두 사서 모두 금의 선조가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기록했다.
아골타는 1068년생이다. 8대조 함보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9백년대 초반이 된다.
왕우량 교수 / 중국다렌대학
"한푸는 고려에서 왔다고 말하거나 고려 전의 신라에서 왔다고 말해도 무관할 것 같습니다.
왕건이 이미 고려를 세웠고 신라는 멸망한 시기로 조선반도는 동란의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왜 함보가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록으로 봐서 한 사람만 왔을 리 없습니다.
분명히 가족 또는 자신의 씨족이나 부락을 데리고 왔을 겁니다. 이것이 민족의 이동이었습니다."
신라 말 고려 초의 격동하는 정세 속에 한 무리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동한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중국 수도 도서관 고(故)문헌실에선 금나라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들을 속속 확인할 수 있었다.
흠정 만주 원류고는 1600년대 초반 여진족이 세운 또 하나의 나라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다.
이 책엔 금의 국호에 대한 설명이 있다. 금은 신라 김씨에서 유래했고 국호도 이를 딴 것이며 그 외의 주장은 근거 없다고 단호하게 정리했다.
김위현 명예교수 / 명지대 사학과
"지금 새로운 주장이 아니고 이미 9백여 년 전에 정사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한반도에서 넘어갔던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주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기다 아니다’ 하는 논란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북만주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중국 대륙을 제패했던 여진의 영웅 아골타.
그의 8대조는 고려 초의 한반도에서 넘어간 사람이었다.
천년 넘는 역사의 저편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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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같은 이야기만 엄연히 중국 정사에 기록돼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겠죠.
이 내용은 앞서 본 송막기문, 금사, 흠정만주원류고 뿐만 아니라 금지(金志), 삼조북맹회록(三朝北盟會編) 등에도 줄줄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민족으로는 최초로 중국대륙을 장악하고 한족 황제를 포로로 잡았던 여진족.
그들의 선조는 한반도로부터 왔고 그들의 성씨는 김씨였다, 어떻습니까?
갈수록 흥미진진해 지는데요.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인 의문의 사나이 김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신라의 왕릉은 모두 신라 수도였던 경주에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무덤만이 이곳 경기도 연천에 있다. 왜 신라 왕릉이 경기도에 있을까?
후삼국 말기 고려의 압박에 경순왕은 신라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기로 한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는 것에 대해 결사반대했다.
"왕자는 울면서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
그렇게 신라 천년 사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엔 특이한 지명이 있다.
‘다물’. 다물은 빼앗긴 나라의 광복을 뜻한다.
이곳 강원도엔 무슨 나라가 있었다는 것인가?
그런데 금강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는 마의태자의 행적에 의문을 품게 하는 유적들이 이곳 인제에 있다.
왜 마의태자 유적비가 여기 있을까?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엔 수백 년 된 대왕각이란 사당이 있다.
매년 김부리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대왕각엔 마의태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인제 인근 곳곳에 남아 있는 마의태자 관련 유적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신라인들이 고려에 저항했음을 보여 준다.
박성수 교수 / 한국학 중앙연구원
"천년이나 되는 신라가 아무 저항 없이 망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신라의 화랑들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의태자가 반대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해 가지고 신라의 저항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강원도 인제 유적들이 있죠."
고려에 항전하던 일단의 반 고려세력들.
그들과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된 김함보는 어떤 관계일까?
고려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한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금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혹자는 평주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금의 선조라고도 한다.”
그런데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과 같은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1636년 김세렴이 일본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남긴 <해사록>이란 책엔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경주에 들린 감회를 쓴 대목이다. 조선 유학자가 여진족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자, 안동권씨 시조인 권행의 후손이라 했다.
아골타의 선조 함보는 김씨인데 왜 권행의 후손이라 했을까?
서기 930년 고려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은 안동 병산에서 대혈투를 벌인다.
이때 안동의 권행과 김선평, 장장필, 세 사람이 왕건을 도와서 고려군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왕건은 이 세 사람에게 태사의 직위를 내리고 김행에겐 권씨를 하사했다.
이로써 김행은 안동 권씨 시조인 태사공 권행이 됐던 것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이 안동의 김행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권행은 본래 경주 김씨였다.
그런데 태사라는 최고의 직위를 받은 권행과 그의 후손들은 이후 백년 넘게 고려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
박성수 교수
"'신라에 대한 충성심, 후백제의 공격을 막고 어디까지나 신라를 위해 싸운 것이지 왕건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그가 왕건의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김함보는 누구인지 명확치 않지만, 그는 김씨 출신의 신라 광복군으로 추정되며 그가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선조임은 명확해졌다.
김위현 교수
"김함보는 신라 왕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김함보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반고려 세력들이 동해안을 거쳐서 두만강을 건너가지고 여진 지역에 옮겨 간 것으로 추론이 됩니다."
격동의 시기 망국의 한을 품고 북으로 올라간 김함보와 그의 무리들.
그들에겐 새로운 땅, 드넓은 만주 벌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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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 김함보의 후손들이 만주를 통일하고 나아가 한족의 본거지인 중국대륙을 장악했다.
이 북방민족인 만주에 중국이 흡수된 형국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여진족은 읍루, 말갈, 물길, 숙신, 주신, 여직, 여진 그리고 만주족으로 등장합니다.
부여와 고구려, 발해의 주요한 구성원들이었고 우려 역사에 한 축을 이루던 사람들이 바로 여진족입니다.
이 금사에 따르면 김함보가 여진족의 땅으로 들어갈 당시 여진의 각 부족들 사이에서는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함보가 우마변상법이라고 하는 일종의 성문법을 제정하고 각 부족으로부터 합의를 이끌어 내자, 그 지도력을 인정받게 되죠.
이 이후 그의 후손들은 완안 여진뿐만이 아니라 전체 여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7세손의 이르러서는 영토가 간도에까지 확대되죠.
그리고 1102년엔 고려로 사신을 보냅니다. 그런데 아골타가 이 여진족의 지도자가 되기 직전 고려와 대충돌이 일어납니다.
1107년 12월. 윤관 장군이 지휘하는 고려군 17만 명은 여진 정벌에 나선다.
고려군의 상대는 김함보의 후손들이었다.
김함보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된 지 150여년 후 팽창하던 여진족은 함경도 인근에서 고려와 잦은 충돌을 벌인다.
이 그림은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북경비를 세운 장면이다.
윤관 장군은 이 전쟁에서 동북 9성을 확보하고 최북단인 공험진에 북경비를 세웠다.
고려의 북쪽 국경선인 공험진은 어디였을까?
일제강점기 때부터 공험진의 위치는 함경남도 일대도 알려져 왔다.
그러나 윤관이 국경비를 세운 공험진은 함경도 종성에서 북으로 7백리 지점이라고 돼 있다. 세종 때 실측한 이 지도(‘조선국회도’를 말함.)를 보더라도 공험진은 함경북도 종성의 북쪽이고 두만강 너머에 있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공험진 비는 이곳 중국 지린성 옌지시 인근에서 발견됐다는 기록만 전해져 올 뿐 행방은 알 수 없다.
조선국회도와 북관유적도 등을 종합해 볼 때 공험진은 이곳으로 추정된다.
여진은 자신들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던 간도지방을 고려에 빼긴 것이다.
다급해진 여진은 고려의 동북 9성을 돌려달라는 서신을 보낸다.
당시 여진 추장은 아골타의 형 오아속이었다.
“일찍이 우리 선조(여진)가 대방 즉 고려로부터 나왔으니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옛 땅을 돌려주시면 기왓장 한 장 던지지 않겠습니다(고려사 예종 4년).”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부르고 있다.
1115년 금 황제가 된 아골타도 여진과 고려는 형제지간이고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했다.
금나라에게 고려는 선조들이 나온 부모의 나라였던 것이다.
왕우량 교수
"동일한 언어, 동일한 지역, 동일한 문화가 있습니다. 이 각도에서 보면 고려와 여진 사이의 전쟁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을 겁니다. 물론 전쟁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었습니다만 그들은 거란이나 몽고와 다릅니다. 거란과 몽고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민족 공동체입니다. 그들에게는 혈연상, 역사상의 유대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여진인과 조선반도의 신라인 나중의 고려인은 민족공동체가 되었습니다. "
금나라 오경 중 하나인 동경성이 있었던 요양.
이곳에서 1985년 우연히 한 점의 비가 발견됐다. 비명은 덕망 높았던 한 스님의 일대기였다.
비가 제작된 것은 1190년, 스님의 성은 고씨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공이 발해인이라고 기록돼 있다.
1190년이면 발해가 망한지 무려 260년이 지난 시점인데, 아직도 발해인이다.
여진과 발해는 어떤 사이였을까?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했던 발해는 926년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멸망했고 발해인은 집단으로 거란의 동경과 상경 등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3백만 발해인들은 끈질긴 광복운동을 벌였다.
거란의 수도 인근에서 발생한 발해인의 반란이 2년 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발해인과 여진족 사이엔 반 거란이란 연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여진인과 발해인은 원래 한 집안이다.” 아골타는 거란에 맞서 봉기할 때 여진과 발해는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로 한 집안임을 주장해 발해유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김위현
"발해, 여진 동일가라는 그런 말이 먹혀들어 갔다고 하는 것은 이미 여진과 발해 사람들 사이에는 우리는 민족적으로 친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먹혀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
베이징은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한족에겐 변방에 불과했다.
여진족은 중원을 장악한 후, 이곳에 대규모 신도시를 만들었다. 북경은 이후 중국의 중심지가 됐다.
이 박물관의 지하엔 금나라 때 건설한 대규모 수로 시설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인공으로 수로를 파서 물길을 연결한 것이다.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나무로 만든 수문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베이징의 명소인 북해공원도 이때 완성된 정원이다.
당시 베이징 건설의 총 책임자는 장호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사대에 걸쳐 황제 신임을 받았던 발해 유민이었다.
장호 뿐 아니라 수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을 형성했다.
대제국을 운영했던 발해인들에 대한 금나라의 신뢰는 단순히 혈연적인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성호 / 동양사학회, 금사 연구
"대제국을 건설, 운영해 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금이 건국을 하고 국가체제를 확장 그리고 반석 위에 올려놓는데 그들의 경험이 상당히 필요했을 것이고 따라서 금은 이러한 발해인들을 중용해서 국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활용했던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요양은 금나라 5대 도시였기 때문에 수많은 금나라 시대의 금석문이 남아 있다.
요양박물관 별관에 늘어선 금대의 비들 속에는 특별한 비가 한 점 있다. ‘통혜원명 대사 탑명’으로 불리는 이 비의 주인공은 관찰사 이후의 딸로 역시 발해인이었다. 남편은 아골타의 셋째 아들인 허왕이다.
그녀의 아들 정국공은 나중에 금 황제가 되는데 이가 바로 금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 황제였다.
4대 황제 혜릉왕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 대씨였다.
금나라 건국 후 많은 발해 여인들은 금 황실로 시집을 갔다. 이로써 발해인들은 금나라의 고위관료층과 왕비족으로 자리 잡았다. 금나라는 발해인과 여진족, 연합정권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김위현
"따라서 금나라는 발해 후손의 왕비족과 그 다음에 신라 후예인 왕족, 이게 합해져서 금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낳았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역사에 한 자리 매김을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금 황실의 선조가 신라 출신이었고 국가의 지배층은 발해유민, 그리고 고려와의 우호적 관계. 여진족 금나라는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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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만주의 역사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신라의 후예와 발해유민이 세운 금나라의 역사가 되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와는 상충되고 우리의 역사와는 맥락이 이어지는군요.
이렇게 만주와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금나라는 또 다른 북방민족인 몽골족의 원나라에 중원을 내주고 만주로 사라집니다.
북방민족인 금나라와 원나라의 삼백년 지배를 받았던 한족이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해서 중국대륙을 지배함으로써 한족의 자부심을 회복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여진족이 1616년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무너뜨리므로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되죠. 이것이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입니다.
제작진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과 관련된 뜻밖의 사람을 북경에서 만날 수 있었다.
북경 농업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청 건륭황제의 7대손이라고 소개했다.
집안인 증조부의 사진을 비롯해 건륭제 후손들의 글씨 등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여진족의 후예들이 세운 중국 마지막 왕조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는 60여 년 동안이나 재위한 황제로 유명하다.
건륭제는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지역까지 장악했다.
지금의 중국 영역은 청 건륭황제가 이룬 것이다.
한족의 나라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만주족이 세운 청 황실의 성은 아이신줘러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성이 김씨라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김괄(金适)이었다.
김괄 / 청 건륭제 7대손
"제 할아버지 성함은 헝쉬입니다. 아이신 줘러 헝쉬요. 헝 항렬입니다.
그는 당시에 직업을 구하거나 학교를 다닐 때 김광평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김계종이고 우리는 그걸 따랐습니다. 저는 김씨입니다."
누루하치는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 후 랴오닝 성 심양을 수도로 정한다.
이곳 심양 광장엔 청태조 누르하치부터 마지막 황제 푸이까지 역대 청조 황제의 12사람의 좌상이 놓여 있다.
청태조의 이름은 애신각라 노이합적(愛新覺羅 努爾哈赤) 즉 아이신줘러 누르하치.
청황실의 성은 한자로 애신각라다. 고
그런데 왜 청황실의 후손인 김괄 교수는 자신의 성을 김씨로 할까?
청나라의 역사서인 만주실록엔 청황실과 만주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자신들은 하늘의 딸인 불고륜(佛庫倫)의 후손들이며 성은 애신 즉 만주어로 ‘아이신’이라는 것이다.
아이신을 한자어로 표기하다보니 애신이 됐고 만주어 아이신의 원래 뜻은 금이다. 각라는 만주어 줘러를 한자로 차음 표시한 것이다. 뜻은 겨레, 성, 씨족 등과 같고 성씨에 붙는다.
김괄
"황족 안에서 우리 성은 아이신 줘러(애신각라)입니다.
아이신 줘러(애신각라)는 만주어이고, 한어로 바꾸면 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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