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양시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요나라 시대의 탑인 ‘요탑’. 고대에는 기존 건축물에 덧씌우기를 하는 방법으로 자기 시대를 상징하는 거대한 건축물을 만든 경우가 많다. 요양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고 발해의 중경이라면, 이 탑 내부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때의 건축물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요나라를 세운 거란인들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때부터 있었던 이 큰 탑에 외부에 거란식 기술을 덧붙여 요탑을 만들었을 수 있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이 탑 내부를 조사하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강역과 문화를 짐작케 하는 뜻밖의 자료가 발견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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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부도 교과서의 고구려 지도, 우리 교과서는 장수태왕 이후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고 밝혔으나. '요사'는 광개토태왕 이후 패망할 때까지 요양을 평양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고대에는 지금의 요서를 요동으로 불렀으니 고구려 영토는 요하를 건너 서쪽까지 미쳤다.
중국이 펼치는 동북공정이 숨 막히다. 그들은 만리장성을 산해관(山海關)너머 만주로 만주로 동진(東進)시키고 있다. 우리는 숱한 전란으로 전해지는 고대 사서(史書)가 적은데 중국은 풍부하다. 그러한 사서를 토대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중국 지방 정권으로 만드는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동북공정을 꺾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
중국은 한 왕조가 망하면 다음이나 다음다음 왕조가 그 나라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그렇게 해서 쌓인 게 ‘25사(史)’ 혹은 ‘24사’로 불리는 역사서다. 학자에 따라 셈법이 달라서 25사냐 24사냐나는 논란이 있는데, 아무튼 중국은 25사(24사)를 정사(正史)로 여기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삼국시대가 끝나자 고려 때 ‘삼국사기’를 만들었고, 고려가 무너지자 조선 때 ‘고려사’를 지었다. 그런데 조선이 무너진 지 한참인 지금 우리는 ‘조선사’를 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사’는 지금 세상에 나와 있다. 대일(對日)항쟁기인 1938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펴낸 ‘조선사(朝鮮史)’가 그것이다.
총독부의 조선사는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와 삼국통일시대(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역사도 담고 있다. 물론 우리는 총독부 조선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건국 60주년은 넘겼음에도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 생각하는 대한민국사와 조선사를 편찬하지 못하고 있다. 이 일을 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국사편찬위원회(국편)인데 국편은 조선사를 제작하지 않고 있다.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갑자기 대한민국이 영원히 망한다면, 조선과 조선까지의 대한민국인이 만든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는 총독부의 조선사가 될 것이다. 왜 대한민국은 자신 있게 우리의 역사를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일본이 건들면 반발하고, 중국이 찝쩍거리면 반항하는 정도의 대응은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정통 사서는 왜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정답은 국편을 제대로 부려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국편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나 주관하는 기관으로 두지 말고, 대한민국이 생각하는 진짜 우리 역사를 쓰는 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으로 동북공정에 대항케 하는 것은 편법이다. 동부아역사재단도 우리의 정사가 있어야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항할 수 있다. 이제 국편은 우리의 정사(正史)를 써야 한다.
정사를 쓰려면 우리 사료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본 우리 역사에 대한 자료도 모아야 한다. 중국의 24사(혹은 25사)에는 우리를 묘사한 것이 매우 많다. 그런데 중국을 지배한 것은 항상 한족(漢族)이 아니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 등 여러 나라가 명명할 5호16국 시대와 거란족과 여진족이 북중국을 지배한 요(遼) 금(金), 몽골족이 전 중국을 통치한 원(元), 만족(여진)이 전 중국은 지배한 청(淸)은 비(非)한족 시절이었다.
비한족 왕국이 무너진 다음에도 중국인들은 그들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런데 요나라 정사인 ‘요사’와 금나라 정사인 ‘금사’는 비한족 왕조인 원나라 때 제작된 유이(唯二)한 중국 정사다. 비한족이 비한족 왕조사를 기록했는데 거기에 우리에 대한 부분이 있다면 그 기록은 객관성을 갖지 않을까. 적어도 동북공정에 맞서는 사료는 되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을 한 학자들이 요사 번역을 시도했다. 뇌교육대학원의 복기대 교수가 기획 총괄을 하고, 단국대 이성규·이성훈 교수가 실무를, 명지대 김위현 교수가 번역을 맡아 단국대 출판부를 통해 ‘국역 요사(國譯 遼史)’를 최근 출판했다. 이 요사에 동북공정에 맞설 수 있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첫째
고조선(기자조선을 의미함)은 지금 중국 요녕성 요양을 수도로 삼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이북 평양에 도읍했다고 배워왔는데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북 평양에 고조선이 있었다고 한 것은 돌아가신 이모 교수가 세운 학설인데 지금은 ‘깰 수 없는’ 정론으로 인정되고 있다.
둘째
위만조선도 요양에 있다가 한무제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는데, 한문제는 그곳에 한4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4군이 이북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배워왔는데, 요사는 한4군이 요양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 있었다고 해놓다.
셋째
우리는 장수왕 이후 패망할 때까지 고구려는 이북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고 배워왔는데, 요사는 광대토태왕 이후 망할 때까지 고구려는 요양을 평양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고 밝혀놓았다.
넷째
많은 사료는 고구려가 당나라와 싸울 때 내호아가 이끄는 당나라 수군이 패수를 통해 평양성으로 쳐들어왔다고 해놓았다. 우리는 고구려가 이북 평양을 도읍으로 삼고 있다가 무너졌다고 봤기에 대동강을 패수로 보았다. 그리고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와 싸워 대승을 한 살수는 그 전방(북쪽)에 있는 청천강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요사는 요양 부근에 패수가 있다고 해놓았다. 그렇다면 살수는 요양 서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살수대첩의 무대가 바뀌는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요동(遼東)은 지금 요하(遼河)의 동쪽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고대에는 지금 요하의 서쪽을 요동으로 불렀음을 보여준다. 요하의 ‘요(遼)’자는 ‘요원(遼遠)하다’할 때의 ‘멀 요’자이다. 따라서 고대 중국인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흐르는 강을 요하로 불렀다. 요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였던 것.
춘추전국시대와 진(秦)나라 시절 중국인들은 산해관을 국경선으로 삼았으니 그 근처에 흐르는 강을 요하로 불렀다. 산해관 근처에 지금 난하(灤河)가 흐르고 있는데, 고대에는 난하를 요하로 불렀다. 따라서 난하 동쪽을 그때에는 요동이었다. 난하의 동쪽의 지금 요하의 서쪽이니 고대의 요동은 지금 관점에서는 요서가 된다.
요사는 ‘요양은 진(秦)나라 때 요양은 요동의 변방이었다’고 해놓았다. 요양은 지금 요하의 동쪽 근처에 있으니 요동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 있다. 그러나 진나라 때라면 요양은 요동의 변방에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 된다. 고대에는 요서가 요동이었다.
그런데 우리 역사가들은 요동에 있다고 돼 있는 고구려의 성을 전부 지금 요하 동쪽에 있다고 비정했다. 고대의 요하를 지금의 요하로 보고, 지금 요하를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으로 본 것이다.
국경 가까이 수도를 두는 나라는 없다. 그러니 국경선에서 멀리 떨어진 이북 평양에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다고 학자들은 본 것이다. 그러나 요사는 고대에는 요서를 요동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은 요하를 건너 베이징(北京) 쪽으로 한참 접근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동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 고구려의 성은 지금 요하 서쪽에 있었으니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은 지금 요하를 건너 서쪽으로 깊이 들어가 있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