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덕홍전과 함녕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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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새해가 밝아 온 1월, 덕수궁을 찾아가는 길은 날씨만큼이나 싸늘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덕수궁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5대 궁궐 중 하나이지만, 가장 나중에 궁궐이 되었으면서도
규모가 가장 작고, 또 가장 비운의 궁궐이다(2013.10.30. 덕수궁, 2014. 05.07. 창덕궁
참조).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평안도 의주까지 피난했던 선조가 1년 반 만인 1593년 10월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거처할 곳이 없었다. 경복궁은 임금이 왕궁과 백성을
버리고 달아난 것에 분노한 사람들이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수소문한 끝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을 임시행궁으로 삼았는데,
폐허가 된 한양에서 월산대군의 사저가 온전히 보존된 것은 한양에 입성한 왜군들이 주둔했던 덕택에 파괴를 면한 것이다.
이곳은 원래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었으나, 강씨를 싫어한 태종이 즉위하면서 능을 한양 외곽인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행궁으로는 너무 비좁아 담장 너머에 있는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桂林君)의 저택과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남동생인
심의겸(沈義謙)의 저택을 헐어서 넓혔는데, 이곳에서 선조가 16년 동안 거처하다가 죽고 1611년 광해군이 즉위했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도 이곳에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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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걷는 연인은 헤어진다' 는 전설을 품은 덕수궁 돌담길
1615년 광해군이
창덕궁을 지어 이궁하면서 행궁은 경운궁(慶運宮)이라고 했는데, 광해군은 1618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면서 서궁(西宮)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에게 끌려온 광해군이 무릎을 꿇고 죄를 추궁 받고 유배를 떠난 곳인데, 인조가 창덕궁으로
가면서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건물을 모두 월산대군 후손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270여년이 지난 1896년 일제의 압력을 피해서
아관파천 했던 고종이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하며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고종은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고, 정문인 남(인화문), 동(대안문), 서(평성문), 북(생양문) 등 4문과 담장을 새로 쌓았으며,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는 선원전(璿源殿), 침전인 함녕전(咸寧殿), 보문각(寶文閣) 등을 짓고, 그해 9월 17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1907년 8월 순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그해 11월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자,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에
덕수(德壽)라는 궁호를 붙인 것이 덕수궁의 기원이다(사적 제124호).
본래 궁궐은 황제나 왕의 가족이 거처하는 장소인
궁(宮)과 황제나 임금과 신하들의 상하관계를 나타내는 단상을 의미하던 궐(闕)을 포함하는 단어로서 관리들의 근무하는 관청(官廳)과
구별되었으며, 궁궐의 각 건물의 구조와 크기는 물론 건물의 이름에도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임금이 근무하는 공간인 전(殿), 세자나
왕자·공주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당(堂), 다른 왕실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재(齋)라고 했다. 그러나 임시행궁이던 경운궁은 석어당과
즉조당, 준명당 등이 전부였다. 석어당(昔御堂)은 ‘옛날 임금이 머물던 집’이란 의미로서 피난지에서 돌아온 선조가 16년 동안 머물다가
승하했고, 그 후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거처했다. 경복궁에서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은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인
팔작지붕인데,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는 것은 임진왜란 때 몽진했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 석어당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했던 곳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1904년 화재로 새로 지은 것이다. 석어당 옆의 즉조당(卽祚堂)은 ‘왕이 즉위한
곳’이라는 의미로서 이곳에서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했으며, 1900년 고종이 중화전을 지을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즉조당 현판은
고종의 친필이다. 또, 석어당 옆의 준명당(俊明堂)은 고종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던 편전으로서 준명전이라 불렀는데, 고종이 60세 때 궁녀
양씨와 사이에서 얻은 고명딸 덕혜옹주를 사랑하여 1916년 준명전을 유치원으로 만들면서 준명당으로 바뀌었다. 즉조당과는 월랑(月廊)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1905년 이곳에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대한문에 들어서면 두 칸짜리 돌다리 금천교(衿川橋)가
있는데, 이것은 궁궐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인공 해자(垓字)다. 금천교를 지나면 고종이 1900년에 지은 중화전(中和殿)의 중문인
중화문이 있는데, 중화문은 원래 중층건물로서 중화전을 에워싸던 담장이 있었으나, 1904년 화재이후 단층으로 낮아지고 담장은 헐렸다.
중화문과 중화전 사이 마당에는 양쪽으로 품계석이 나란히 있고, 정전인 중화전도 본래는 중층 건물로 지었으나 1904년 화재이후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낮춰서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인 중화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달리 월대에 둘레석도 없고, 중화전에는
임금의 어좌와 그 뒤에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병풍이 있다. 중화전은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종이 정궁으로 삼은 덕수궁은 유난히 잦은 화재로 여러 차례 중건되었는데,
1900년 선원전 등이 화재로 소실되자 1902년 정전인 중화전과 관명전(觀明殿)만 중건했다. 국운이 나날이 기우는 상황에서 궁궐인들
제대로 갖춰질리 만무했다. 1904년 또다시 대규모 화재로 즉조당·석어당·함녕전 등이 불타자 중건할 때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도
지었는데, 이때 동쪽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문인 인화문 대신 대한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대한문의 현판은
1906년 한성판윤 남정철(南廷哲)의 글씨라고 한다. 그러나 1919년 2월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한 이후
주인 없는 덕수궁은 일제에 의해서 점점 파괴되어 1922년 선원전 사이에 도로를 뚫었다. 이때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엄비(嚴妃)의
혼전이 헐려서 경기여고로, 도로의 동편에 있던 제사 준비소에는 덕수초등학교가 세워졌다. 또, 1968년에도 도시계획으로 덕수궁 담장이
안으로 좁혀지고, 1970년에는 대한문이 안으로 옮겨지는 등 수난을 겪었다. 덕수궁 입장료는 1000원씩이다.
중화전
오른편에는 담장을 경계로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을 중심으로 왼편에 덕홍전(德弘殿)이, 뒤쪽에는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靜觀軒)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인 덕홍전은 고종이 외국사신이나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으로서 전기시설이 된 현대식 건물이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 아니어서
바닥은 마루로 만들었다. 또, 함녕전 뒷동산에 중국풍 건물인 정관헌은 고종이 연회를 열거나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던 곳인데, 궁궐
건물로는 약간 천박한 모습이다. 한편, 준명당, 석어당 왼편에 있는 석조전은 경운궁에 화재가 빈발하자 고종이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대한제국의 왕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은 대리석건물로서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 완공한 3층 건물인데, 조선의 전통적인
팔작지붕에 르네상스식 기법이 가미되었다. 2층은 접견실, 3층은 황제의 침실, 반지하인 1층은 시종들의 대기장소였으나, 해방 후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1953년부터는 국립박물관으로, 1973년부터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쓰이다가 2014년 10월부터는 ‘대한제국 역사박물관’이 되었다. 또, 석조전 남쪽의 또 다른 대리석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로서
지금도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덕수궁은 국운이 쇠약한 한말 조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비운의 현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