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신채호의 역사 연구가 지니는 명백한 한계점(펀글)

친가유 2014. 10. 23. 23:30

신채호의 역사 연구가 지니는 명백한 한계점(펀글)

 

 

 

 

인터넷에 신채호를 비판하는 글을 쓰게 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매국노" 라느니, "민족 반역자", 혹은 "일본의 스파이" 라는 등 품위없는 욕을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 때문에 이 답변을 쓰는 저로서는 우선 제가 <<조선상고사>>, 그리고 단재 선생과의 인연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물론 아무리 사정을 써 놔도, 덮어놓고 욕설부터 하시는 몇몇 분들이 글을 제대로 읽어보시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요.

   

 

 

 

제가 <<조선상고사>> 를 처음 읽어본 것은 15년전입니다. 어렸을 때였고, "왜곡되어왔던 참 역사" 를 찾아가는 신채호의 힘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나도 나중에 역사학자가 되어서 신채호처럼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야지'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신채호처럼 되기 위해 한문 공부도 하고, 서점에서 한문으로 된 중국 사서를 구입했습니다. (흔히 25사라고들 하는...)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 스스로 한문을 읽을 줄 알게 된 후에, 신채호가 인용했던 중국 역사서들을 직접 읽어보니 신채호의 사료 인용이 대부분 엉터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몇 글자를 빠뜨리고 읽는 통에 문장의 뜻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물론, 이 책에 있는 것과 저 책에 있는 것을 헷갈리기도 하고, 본문과 주석을 구별하지 못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추적을 계속 해 본 결과, 신채호가 마치 추리소설 쓰듯이 제시했던 "우리의 잃어버린 진실의 역사" 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한문 오독(誤讀)에서 나왔다는 점을 알게 되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식입니다.

    

 

 

(1)<<조선상고사>> 에는 사실 삼조선이 정말 존재했다는 논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논증은 <전후삼한고> 에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채호가 제시한 증거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단재는 <<사기>> 조선열전의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일찍이 연나라의 전성시대에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라는 구절 뒤에 붙은 <사기색은>의 주석, "燕嘗略二國以屬己也"(연나라가 일찍이 두 나라를 공략하여 복속시켰다)라는 말이 "진번" 에 걸리는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조금 설명을 하자면, "진번조선" 이라는 4 글자가 과연 하나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진번과 조선" 인지 <<사기>> 의 저 문장만 봐서는 조금 애매합니다. 물론 조선열전의 다른 부분을 보면 "진번" 만 따로 적혀 있는 곳도 있어서, 비로소 "진번과 조선" 임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색은> 의 주석은, 읽는 사람이 혼동하지 않도록 "진번조선" 뒤에 설명을 달아서 "두 나라(二國)" 라고 부연해 놓은 것입니다. 즉, "진번과 조선, 이니까 헷갈리지 마라" 는 뜻으로 써 놓은 것이지요. 그런데 단재는 이 주석이 "진번" 뒤에 붙어있는 말이라고 착각을 한 탓에, "진번" 이 "眞+番"의 두 나라라고 오해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때문에 그는 "진번, 조선" 을 "진번조선" 으로 읽어버렸고, 이것을 "진조선+번조선" 이라고 생각해 버렸던 것입니다.

   

 

 

(2)<<조선상고사>> 에서 단재는, 고구려가 한무제의 군대와 9년동안이나 전쟁을 벌여서 승리한 적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근거들은 잘못되었습니다.

   

 

첫째, 단재는 <<한서>> 식화지에 팽오 사건이 "무제즉위후 수년" 에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했지만, <<한서>> 에는 사실 이런 말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사기>> 평준서에서 "엄조와 주매신이 동구를 강회로 끌어들였다" 라고 기술한 사건을 두고 "무제즉위후 수년" 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팽오 사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둘째, 단재는 <<한서>>주보언 열전에서 주보언이 원광 원년에 상소한 내용 가운데 "略濊州建置城邑" 이라고 했으며, 이는 9년 정쟁이 일어난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한서>> 에는 역시 그런 말이 없습니다. 저 말은 실제로는 <<사기>> 평진후주보 열전에 나오는 것이며, 상소를 올린 연대가 원광 원년이라는 말도 없습니다. 원광 원년은 주보언이 관리로 추천받기 위해 위청을 찾아간 해입니다.

   

 

 

(3)단재는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그 근거 역시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천남생묘지명" 과 <<삼국사기>> 를 오독했습니다.

   

 

즉, 단재는 천남생 묘지명에서 "廿四兼授將軍餘官如故廿八任莫離支兼授三軍大將軍" (24세때 나머지 관직을 그대로 하면서 장군을 겸하였고, 28세때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라고 되어 있는 구절의 "兼授將軍餘如故廿八" 을 뭉텅 건너뛰고 읽는 바람에, 남생이 24세때 막리지 겸 삼군 대장군이 되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남생이 24세였던 해가 바로 657년입니다.

   

 

단재는 거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에, 막리지는 오직 한명만이 가질 수 있는 관위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문에 남생이 막리지가 된 것은 연개소문이 죽어서 그 지위를 이어받은 것이라 보았습니다. 여기에 발췌 오독이 겹쳐서 연개소문이 657년에 사망했으리라 생각해 버린 것이지요.

  

 

 

(4)단재는 <<문헌비고>> 에 "월왕 구천의 고도를 환(環)한 수천리가 다 백제지(百濟地)" 라는 말이 나온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런 말은 없습니다. 월주에 대한 주석으로, "越王句踐所都 會稽山陰之地 唐時爲 越州(월왕 구천의 도읍으로, 회계산의 산음(산의 북쪽)이다. 당나라때 월주라 불렀다)" 라는 말이 나올 뿐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링크를 참조해 주십시오.

   

꼭 읽어볼 글---> 삼조선설에 대한 보론(링크)

꼭 읽어볼 글---> <<만주원류고>> 인용에 대해(링크)


실상을 알게 된 저는 크게 실망했고, 어찌어찌하다가 역사학자가 되겠다는 꿈도 접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저는 중요한 것을 하나 배우게 되었습니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설령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필경 무슨 이유가 있는 법이다."

    

 

흔히 재야사를 하시는 분들, 재야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우리날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감히 말하지만 이 분야의 비전공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책을 보고 자료를 수집해 봐야, 대학원을 나온 전공자들의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도 못합니다.

 

   

단재의 학설이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1) 가장 기본적인 사료 인용에서 허다한 오류가 있었기 때문에 논리 전개의 기초 자체가 잘못되었다.

 

   

(2) 사료비판에 있어서, 객관적인 자료에 의거하지 않고 음모론적인 시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선동의 효과는 있을지언정 설득력이 결여되었다. (당태종이 역사서를 전부 검열해서 고쳤다는 식의 이야기. 실제로 그 주장에는 아무 근거가 없고, 무수한 반증사례가 존재. 이에 반해 전혀 검증받지 않은 야사류인 "서곽잡록" 등과, 소설에 불과한 "갓쉰동전" 등은 무비판적으로 인용.)

 

   

(3) 위의 (1), (2)가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에 논리 전개가 순환논증으로 이어진다. 즉,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은 전제

를 통해 결론을 유도하고 그 결론이 다시 전제를 뒷받침하는 형식이다.

 

 

 

    

제가 보기에 신채호의 연구는 오늘날, 사실상 "결격 판정" 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신채호가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으로 역사를 연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즉, 일제시대에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대사를 과장함- 신채호 개인의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비롯된 바도 있습니다. 이 점은 단재의 출중한 능력을 염두에 두었을때 크게 안타까운 점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채호는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를 구입해서 보기가 힘들었고, 이로 인해 어렵게 얻어 본 것을 외워서 쓰거나, 남이 써 놓은 것을 재인용 하는 선에서 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실수가 많았던 것입니다. 하필 그러한 실수들이, 중요한 결론을 유도해 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탓에 그의 학설 전체가 엉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의 커다란 비극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지식in 에서 여러번 했던 것인데, 받아들이는 분들은 좀처럼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람의 사고방식은 거의 비슷해서, 감동적으로 읽은 책의 내용이 "엉터리" 라고 남이 말해준다고 해서 선뜻 받아들이기란 어렵습니다. 저처럼 직접 찾아본 뒤에 깨닫고 충격을 받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비전공자가 신채호 연구의 문제점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한문 원문을 줄줄 인용하며 "중국 역사책에 분명히 이렇게 나와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추론해 보면..." 이라고 전개해 나가는데, 그 한문 원문 자체가 엉터리일거라는 생각은 독자 입장에서는 좀처럼 하기가 힘든 일이지요.

 

질문자께서 아무쪼록 현명한 판단을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