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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영웅의 마지막 임무

친가유 2014. 7. 28. 21:50

6·25전쟁 참전영웅의 마지막 임무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1주년이 되었던 지난 7월 27일, 대한민국을 방문한 매우 특별한 손님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직접 수립하고,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작전 등 6ㆍ25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에드워드 로우니(Edward L. Rowny) 예비역 미 육군 중장이다. 그는 국가보훈처가 주최한 『제61주년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에서 다른 4명의 유엔군 참전영웅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 로우니 장군과 6·25전쟁

로우니 장군은 6ㆍ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주요 인물들 중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6ㆍ25전쟁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분이다. 로우니는 1950년 당시 공병 중령으로서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군수기획장교였다. 1950년 6월 초, 여러 기밀자료를 분석,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보고하였는데, 6ㆍ25전쟁 당일에는 당직장교로서 북한의 남침 사실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최초로 보고하였다. 이후 그는 맥아더 사령부의 대변인 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 7월, 맥아더는 서울의 적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구상하면서, 로우니와 작전계획장교 2명에게 계획수립을 지시했다. 계획수립팀은 상륙장소로 인천을 선택했다. 조수간만의 차, 협소한 지형 등의 문제로 인천상륙에 대한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 때문에 기습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장점이 부각되어 결국 8월 28일 미 합동참모본부가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승인하였다. 로우니를 포함한 계획수립 담당자들은 20여 일 만에 상륙부대 편성, 장비 이동 등 복잡한 세부 계획을 추가로 완성하였다. 그 결과 세계 전쟁사에서도 최고의 작전으로 손꼽히는 인천상륙작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1950년 12월, 로우니 장군은 제10군단 공병부장으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미 제1해병사단을 무사히 구출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중공군이 고토리 남쪽 6km 지점의 수문교를 파괴, 아군의 철수를 차단하자 수송기 8대로 자재를 공수, 임시교량을 가설함으로써 병력과 차량을 무사히 철수시킨 것이다.

흥남철수작전 때는 10만여 명의 주민들을 함께 철수시키기 위해 가용한 선박을 최대한 동원하도록 조치하였다. 심지어 자신을 태우기로 했던 마지막 배가 몰려오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침몰하는 일촉즉발의 순간을 맞기도 했지만, 로우니는 침착하게 모든 병력과 피란민을 먼저 안전하게 철수시키며 임무를 완수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자 서로 유리한 위치에서 휴전을 맺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던 1951년 9월. 제38보병연대장을 맡게 된 로우니 장군은 강원도 양구에서 벌어진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단 1명의 전사자도 없이 ‘김제고지’ 점령에 성공하여 보병 지휘관으로서의 역량도 인정받았다.

그는 1952년 7월 순환근무로 한국을 떠날 때까지 전장에서 맹활약했으며, 1970년부터 2년간 한미연합사령부의 전신인 한미 제1군단의 초대단장을 지내며 한미동맹 강화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 노병의 마지막 임무

로우니 장군은 최근 6ㆍ25전쟁에 대한 회고록 『An American Soldier’s Saga of the Korean War(한 미국 군인의 한국전 무용담, 한글번역본 제목: ‘운명의 1도’)』을 발간하였다. 올해 97세의 참전영웅은 이번 한국 방문이 “6ㆍ25전쟁에 대한 나의 마지막 임무”라고 하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1945년 8월, 38도선으로 한반도 분할이 결정된 비화(秘話)를 소개하고 있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대일선전포고와 함께 한반도로 진입하는 소련군의 남하를 제지하기 위해, 미 전쟁지휘부는 한반도를 어느 곳에서 분할할 것인지를 검토했다. 대부분의 참모들이 ‘한반도에서 폭이 가장 좁은 39도선이 적은 병력으로도 방어에 유리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당시 작전과 장교였던 로우니의 상관 링컨(Abe Lincoln) 장군은 이러한 의견을 묵살하고 1도 아래의 38도선을 일방적으로 그어버렸다. 링컨 장군은 당시 한 지리학자가 주장한 ‘많은 창조물들이 38도선 부근에서 태어났다’는 학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 학자의 학설에 경도된 정책결정에 의해 한 나라의 운명과 피 흘리는 전투원의 생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로우니는 “당시 39도선으로 결정했다면 후에 수많은 군인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자신을 포함하여 당시 결정 과정에 참여했던 참모들의 실수를 고백한 것이다. 또한 적의 대공세에 맞서 최초의 38도선 근처에서 전선을 유지한 채 휴전에 합의한 것도 전쟁 확대를 원치 않았던 미군 수뇌부의 판단이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용기 있는 고백을 통해 알게 되는 역사의 비화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는 자의 슬픔과 힘이 없으면 그냥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용감한 한국군과 유엔군의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킬 수 있었다”라는 로우니 장군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며, 동시에 스스로 조국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부족했던 아픈 과거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방부 국방교육정책관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