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학교에서 만난 해병 이야기......
1980년 5월 27일, 이 땅의 광주에서 본격적으로 불 붙은 민주항쟁으로 아까운 목숨들이 군화발에 짓밟히거나 총칼에 죽어갈 때, 비록 그들과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모 처에서 그들을 지지하면서 비열한 인간들의 행위를 비판하고, 농촌사람들을 계몽하다 잡혀서 곤욕스러움을 당하고 있을 때, 학교와 부모님과 작은 아버지의 눈물의 호소로 군입대를 제의 받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강릉역에서 출발하는 논산행 군용 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는데 시국 관련자들이란 이유 때문에 민간인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인 혹은 육체적인 모독을 감수하며 논산까지 가야했다.
정상적인 입대 병력에다 나같은 비정상적인 병력이 더해져서 연무대는 그야말로 만원이었다. 어쩌다가 주특기 배정을 위해 적성검사를 하게 되고, 검사를 제대로 받지 않은 탓인지, 적성과 전혀 무관한 중장비 운전의 주특기를 받게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수한 성적으로 소정의 훈련 과정을 마쳤고, 중장비 운전교육을 위해 김해 공병학교에서 11주 일정으로 후반기 교육에 임해야 했다.
내무반을 배정 받았는데, 40여명 중 공군 1명, 해병 4명의 타군이 위탁의 명목으로 끼어있었다. 처음엔 의아했지만 후반기 교육에는 주특기를 위한 타군의 위탁교육이 전책이라고 했다.
80년이라 이런 저런 사유의 병력들이 넘쳐났고, 공병학교 개교이래 최대 병력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아침에 기상을 해서, 교육장으로 움직이거나 특히, 많은 병력 때문에 식사시간이 채 5분도 안되는 점이 , 그것을 실감케 했다.
타군, 특히 해병과의 동침이 불편해 지기 시작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날이 필요치 않았다. 3일 쯤 지났을 때였다. 우리 내무반 바로 옆에 대형 목욕탕이 있었는데, 취침점호를 마치고 나서 잠자리에 들려고 하면, 그 곳에서 '퍽퍽'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래 그냥 모른척 지나치기가 힘들어서 옆에 누워있는 동기에게 물었다.
"야! 무슨 소리냐? 누군가 얻어 맞는 소리잖아? 조교들께 알려야 하는 거 아니냐?"
"저 소리.... 해병들 선임기수들이 후임들 패슨 소리다.! 못들은 척 잠이나 자라∼! 저건 해병애들 오랜 전통이고, 이 곳 조교나 교관들도 큰 사고 없음 모른척 한다더라!"
그 애길 들어면서 해병들 자릴 힐끔 바라보았더니 역시 빈자리였다. 점호가 끝나면서 어수선한 사이, 그들은 목욕탕에 집합한 것이었다.
별 수 없이 그냥 지기로 했다.
한참 후, 육두문자를 날리면서 내무반으로 들어오는 4인의 해병들.....
불침번이 쳐다 보았는지....
"뭘 보냐? 씁새야! 눈깔어라.... 맘 아푸니까 말이다."
그들에게 용히히 하라고 말하는 육군 이등병은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 숨까지 참아가며 잠들어 있는 척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교육장을 출발하기 전 해병 중 한 녀석이 조교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무반 전원을 집합시켰다.
"야! 너희들에겐 정말 미안한데, 우리 좀 봐주라! 우린 배고프고 힘든 사람들이다. 우린 너희들을 상대할 대상이 아니다. 우린 이 곳에선 최소 단풍하사들과 상대해야 하니, 괜히 우리들에게 엉겨서 불미스런 일 없도록 도와주라! 너희들과는 친하게 지내고 싶다."
역시 무언의 반응들..... 나도 마음속으로 더러워서 동의해 주었다.
그들은 교육장으로 이동을 하거나, 교육에 임할 때만 우리와 함께 행동했지만 일단 교육장에서 철수하거나 식사시간, 자유시간엔 오직 그들끼리 뭉쳐 다녔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선임을 보아도 경례를 하고, 어슬렁 걷지 않았다. 가끔 하사관 교육생들과 맞짱을 뜨기도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그 피해 는 고스란히 우리 공병 이등병들에게 돌아 오곤 했다.
군대는 계급순이라 점심시간, 식당 입장에 있어 거의 동시에 식당입구에 도착했다면 대부분 하사관 교육생들이 먼저 입장을 히게되는데....
해병들은 자기네끼리 따로 모이고, 열 맞취서 도착은 하지만 무조건 새치기를 한다.
불쌍한 공병들.... 하사관에게 밀리고, 해병에게 밀리다가 겨우 식판을 들고 밥을 수령하지만, 자리가 없다. 어쩌다가 겨우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해병들이 "웬만큼 먹었음 좀 일어나지?"라고 하면 일어나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예 서서 밥을 먹었다. 서서 먹다가 걸리면 얻더 터지니까 그것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국에 발이랑 반찬 모두를 섞어 돼지밥처럼 만들어 씹지도 않고 삼키는 수준으로 먹었는데 그 짓을 11주를 한 것이다.
후반기 교육 내내 입천장이 데어 있었던 이유가 점심시간이 짧은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해병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밥을 먹고나면, 우린 다시 줄을 맞춰서 식기 세척장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곳에서도 한참이나 줄서서 기다려야 한다.
하사관들은 미안하다며 새치기를 하고 해병은 미안하단 말대신 죽을 죄를 진다며 밀고 들어오고..... 그래서 육군 공병은 매일 바쁘기만 했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생존의 방법이 달랐기에 있을 수 이쓴 일이었다고 회상해 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다행스럽게도 함께 했던 내무반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우리 공병은 해병의 입장을 이해했고, 좀 더 고생하던 그들의 위해 양보했기 때문이었다.
티격태격 하면서 교육에 임하면서도, 경남도에서 실시하는 면허시험에 응시해서 대부분 면허증 하나씩 들고, 11주 후반기 교육을 마쳤다. 그날, 많는 날 함께 했기에 부척 친해진 그들과 이별을 했다.
처음 내무반 병사들을 모아 놓고 협박과 같은 부탁을 했던 그 친구가 말했다.
"그동안 미안했고, 우리가 마음 평하게 생활 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어서 고마웠다. 우리가 지냈던 이 곳은 천당이었다. 이제 또 다시 지옥으로 가게 되는데, 이 다음에 우연히 만나게 되면 막걸리 한 사발 나누자!"
지금, 그들과 연락을 하고 살지는 않지만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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