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宗 (20)
1688년 ~ 1724년 (37세), 재위 1720년 ~ 1724년 (5년)
경종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조선의 20대 왕으로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숙종과 영조 사이에 낀 임금인데다 재위기간이 짧다보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바닥을 기는 왕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나긴 英趙 시대를 설명하는데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게) 빼놓을 수 없는 왕이기도 하다.
肅宗의 첫 아들이었던 까닭에 태어난지 100일도 안되어 원자 책봉을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肅宗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희빈 장씨의 소생이었고, 연잉군과 연령군이 태어나기 전에는 숙빈 최씨 소생의 아들이 있긴 했는데 그나마도 요절한 까닭에 숙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장희빈과 이를 배경으로 하는 남인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유년기에는 비교적 평탄한 세자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숙종은 알다시피 무수한 환국을 일으키며 신하들을 찍어눌렀고, 어머니가 후궁으로 낮추어지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그도 인현왕후의 아들이 된다. 어찌보면 어머니의 원수지만 그래도 인현왕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하며 생모인 희빈 장씨를 찾아갈 때도 꼬박꼬박 인현왕후에게 허락을 받았고, 인현왕후가 앓아눕자 생모를 뵙겠다는 말도 못 하게 되어 안쓰럽게 여긴 인현왕후가 생모를 보러가라고 보낼 정도였다. 14세가 되던 해에는 결국 생모 희빈 장씨까지 사약을 받는 사태가 터졌다. 이 때 세자였던 경종은 대신들에게 찾아가 어머니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지만 "이게 다 세자 저하를 위한 것"이라 둘러대면서 세자의 요청을 쌩깠다.(야사에서는 이 사건 이후로 경종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거기다 생모가 사약을 받는 와중에도 법률상 어머니인 인현왕후의 빈소를 상주로서 지켜야했으니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후 1716년의 丙申처분(숙종 시대인 1716년에는 병신처분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을 처분한다는 뜻이 아니고, 숙종이 송시열과 윤증 간의 시비(회니시비)를 판단한 후 "윤증이 송시열을 깐 글이 많지만, 송시열이 윤증 아빠 윤선거를 위해 지은 묘문 중에는 윤선거를 깐 글 따위는 없는데?"라고 이 시비를 정리한 처분. 결과적으로 노론의 편을 든 셈이다.)으로 2년전 죽은 윤증이 추탈되면서 상황은 그로기로 몰렸다.
숙종 말년에는 부왕이 지병으로 누워 대리청정을 맡게 된다. 이는 노론의 이이명이 숙종과 독대한 후에 청한 것으로서(정유독대), 주도자에서 보듯 경종의 실수를 통해 세자를 교체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경종의 대리는 내리는 비답이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 하겠다"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기록에 보면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계 신하들이 유의하겠다 유의하겠다고만 하지 말고 가끔은 모르면 물어보고 의견도 내어보시라고 간했는데 경종의 답변은 "유의하겠다"였다.
다만 딱 한번 큰소리를 내며 노발대발한 적은 있다. 승지 유숭이 늦게 입시하자 '당장 여기서 물러나라. 사관들도 물러가라!' 하며 화를 낸것. 돌발 상황에 대신들도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라 했고 승지들이 간신히 세자를 달래서 진정할 수 있었다. 아마도 억누른 감정이 작은 일에 터져나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며칠 뒤에 신하들이 이 일을 지적할 때의 대답은 "유의하겠다."가 전부였다.
어머니가 사약을 받아서 자신도 아버지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태고 연령군, 연잉군이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다가 자신도 정궁의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따지고 보면 후궁 소생. 장희빈이 한 때 중전까지 된 적은 있으나, 경종이 출생할 당시 장희빈의 신분은 중전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갈릴수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반응한 듯하다. 정궁인 인현왕후의 폐서인과 복위, 어머니의 사사를 보면서 부왕(숙종)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숙종은 세자교체를 내심 고려했는데 당시 청나라 강희제의 태자가 교체되었고 연약하고 강하지 못한 경종을 못 미더워하는 점이 실록에도 간간히 보인다.
노론에서는 이런 왕의 의도를 알고 연잉군을 밀어주려 안간힘을 썼고, 숙종의 의중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자를 지지하던 소론 측 인사들이 격렬하게 반발했고, 숙종이 앓아서 누워있는데다 대리청정까지 하고 있는 세자를 함부로 바꾸자고 나오기 어려웠다. 노론에서 세자가 큰 실책을 저지르길 기다렸다가 이를 빌미로 공격하려 했는데 세자가 큰 사고없이 무난히 정국을 이끌어나가다 보니 "어? 어? 이게 아닌데?!" 하고 있다가 실패했던 셈이다.
아슬아슬하게 세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景宗은 1720년 숙종이 승하하면서 간신히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즉위 후 노론의 우려와는 달리 피의 복수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즉위했다고 해도 다수파인 노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경종도 하루가 멀다하고 자리보전하고 눕기 일쑤였으니 치적을 세울만한 환경은 못됐다. 오죽했으면 잘 씻지도 못해서 봉두난발에 냄새까지 났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은 연잉궁의 세제 책봉을 관철시켰고, 심지어 대리까지 주장했다.(;;) 이 대리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김일경이 이를 근거로 노론의 숙청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피바람이 분다. 또 다음해인 1722년, 목호룡이 노론이 景宗을 살해하고 이이명을 옹립하려 한다라고 고변하는 사태(삼수의 옥)가 발생했다. 이렇게 신축년, 임인년 두번에 걸쳐 대숙청인 신임옥사 가 일어난다. 이 과정이 景宗의 태도변화와 맞물려 매우 드라마틱 하므로 항목 참조. 일부에서는 경종이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다는 해석을 택하고 있고, 알려진 해석들은 병약한 경종이 소론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인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전자의 가능성이 상당하다. 경종이 노론의 변명에 태도를 돌변하여 "결탁이니 교통이니 따위의 말은 심히 무엄하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일갈을 날려버렸다든지...
대리청정 논란으로 유배되어있던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이 유배지에서 사약으로 사사되고, 노론측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뒤 경종 말년까지 소론 강경파들이 집권하며 노론의 씨를 말리는 피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때 이후로도 景宗은 한번 제대로 분노를 폭발시킨 적이 있다. 노론이 초토화되자 소론 측에서는 얼씨구나 하고 노론 씨말리기에 더불어 英祖 의 세제 추탈에도 앞장섰는데 그 와중에 너무 경종이 소극적이라는 식의 주장이 나왔다. 그 말에 景宗은 전에없이 크게 분노하여 '니들 내가 호구로 보이냐 다들 사표쓰고 꺼져!'라며 일갈을 토해냈다.
당황한 소론은 싹싹 빈 끝에 겨우 景宗의 화를 가라앉혔고, "우리도 너무 나대나다 노론처럼 싹 갈리는거 아냐?" 하는 불안감에 노론에 대한 공격 수위를 낮추기 시작했다. 바로 그 상황에서 소론 강경파(준론 - 김일경 등)와 온건파(완론)의 분당이 일어났다.
이렇게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정쟁속에서 치이다가 결국 즉위 4년, 37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세자 대리청정시절 노론 대신들을 찍어누르고 양전사업을 강행해서 완성시켰던 기록 등이 있는 걸 보면 뒷배경만 안정적이었으면 국정을 잘 이끌어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발간되었고, 서양의 것을 모방한 소화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景宗은 자식을 두지 못했고, 이미 연잉군을 왕세제로 지명해뒀기 때문에 연잉군이 그 뒤를 이었다. 이에 잘 알려진 景宗의 불임설이 있다.
景宗은 젊어서부터 병약했다. 어머니가 당쟁이 휘말려 죄인으로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상황에서, 제2의 燕山君이 되어 피바람이 몰아칠까봐 두려워한 노론 신하들이 틈만나면 갈궈대고, 아버지 숙종도 희빈 장씨의 아들이란 이유로 허구헌날 갈궈대니 거기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을 것이다.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는 평이 있긴 한데 노론측에서 남긴 기록을 보면 살짝 정신이 돌아버린 부분도 있었던 모양.
노론 강경파의 단암만록을 인용하자면 '세자는 때때로 벽을 향하고 앉아서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했다. 또 한밤중에 계단과 뜰 사이를 방황하기도 했고 정신도 안정되지 못했으며 지각도 불분명했다. 숙종의 상에도 한 번도 곡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까닭없이 웃기까지 했다.' 노론의 기록이란 특성상 악의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있으나 경종이 느낀 스트레스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임설도 여기에 나왔다.
景宗이 자식을 두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가 사약을 받기 전 희빈 장씨가 죽기 전에 세자를 보고 싶다고 애원했고, 이에 마음이 약해진 숙종이 세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하지만 희빈 장씨는 돌연 세자의 영 좋지 않은 곳을 꽉 붙잡고 당기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때문에 경종이 기절했는데 이로 인해 자식을 둘 수 없는 성불구자가 됐고 병약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景宗이 성불구였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며 학자들은 대체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생식능력 저하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결혼을 2번이나 했음에도 끝내 자손을 두지 못했고, 계비인 선의왕후와 함께 양자를 들이려고까지 했으나 노론의 반대로 결국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임명했다.
세자/세제 책봉은 청의 승인을 받아야 되는 일이었는데 청나라에서 "아니 왕이 아직 젊은데 왜 동생을 세제로 책봉하나?"라 의문을 제기하자 당시 책봉요청을 위해 갔던 노론의 이이명이 "왕이 발기불능이라 자손을 둘 수 없다"고 보고했다. 결국 청나라의 기록에도 남게 됐는데 그 때문에 경종이 성불구였다는 설이 퍼진 모양이다. 이래저래 안습.
노론과 소론의 정쟁 속에서 동생 연잉군이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으나 형제 간에 우애는 각별했다고 한다. 소론의 공격으로부터 연잉군을 필사적으로 보호했고, 동생이 찾아오면 환대하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등 평소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景宗이 병색이 완연해져 자리보전을 하고 있을 때 연잉군이 병문안을 들었다. 그러자 아픈 와중에도 景宗이 "창문을 열어라, 세제가 덥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
박시백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상검이 일으킨 역모사건 이후 경종이 속으로는 연잉군을 매우 불신했으나, 세제에 대한 의혹들을 차단하고 보호함으로서 좋든 싫든 연잉군이 자신의 하나뿐인 후계자임을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시각에 따르면 영조는 이후 "황형"이라며 경종의 우애를 강조했으나 이것은 정치적인 쇼맨십이었을 뿐이며, 진정한 대계를 생각한 경종의 것이 더욱 우애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줄이면 애증.
景宗과 연잉군의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는 景宗이 연잉군에게 직접 폭언을 한 적이 있다. 신임옥사 직후 정치적 위협을 느낀 연잉군이 '환관과 궁녀 중 나를 해치려 하는 자가 있다'며 조사해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자 景宗은 이를 거부했다. 연잉군이 거듭 요구하자 경종은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린 것. 연잉군의 의도는 내관 및 궁녀 집단에 있는 자신의 반대 세력을 탄압함으로서 세제로서의 위치를 강화하고자 한 것인데, 이를 간파한 景宗은 지나친 부탁에 분노한 나머지 연잉군에게 폭언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연잉군이 '주상께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시니 차라리 세제 자리를 내놓겠다!'는 폭탄 선언을 거듭해서 했고, 당황한 조정 대신들이 수사를 속개해 실제로 연잉군을 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내시 박상검과 문유도, 궁녀 석렬과 필정을 잡아들여서 자백을 받아낸 후 사형을 집행했다.
서로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景宗은 英祖를 소론 강경파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었고, 영조 역시 죽을 때까지 이복 형 경종에 대해 자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말을 자주 했다. 특히 영조 재위 초반기 영조가 내세운 탕평책의 중심인물들은 바로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 온건파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소론 강경파들은 끝내 영조를 거부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노론의 지지를 받은 세제 영조가 소론 정권 아래서 무사히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나아가 영조의 탕평책에 힘을 실어준 셈이니 영조 입장에서 경종은 분명한 생명의 은인이자 자신의 정책에 힘이 된 신하들까지 내려 준 '어진 황형'이다. 영조가 경종에 대한 우애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면도 있지만, 자기 권력이 막강해져서 꼭 이런 정치적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없는 말년까지도 형을 그리워한 행적을 보면 영조가 경종을 그리워한 것은 완전히 정치적 제스처였다거나 가식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심지어는 죽기 6년 전인 77세 때 손자 정조와 함께 존현각에 올라서는 "이 건물이 우리 황형께서 세자 시절 공부하시던 곳이다. 오늘 할아비와 손주가 함께 앉으니 황형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구나"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죽기 직전 독살 시도가 있었다고도 한다. 경종은 말엽에 다시 기운을 잃고 잘 먹지 못했는데 게장과 감을 먹자 다시 입맛을 되찾았다고 하는데 그 후 다시 건강 상태가 악화된다. 경종의 상태가 오늘내일하자 세제 연잉군이 어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과 부자를 들게 했고 경종은 연잉군의 처방 후 잠시 정신을 되찾는 듯 했으나 얼마 안가 다시 건강 상태가 다시 악화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승하했기 때문. 그 때문에 신임옥사 때 주모자들이 경종을 독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점과 이들이 세제와 가까운 사람들이였다는 정황 증거 때문에 소론을 중심으로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독살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왜냐면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몸에 안 좋기는 한데, 죽을 정도는 절대 아니고 어의가 처방한 약과 연잉군이 올린 인삼차가 상극이기는 했지만, 어의가 믿을 놈이 못 되었다. 툭하면 이 약 처방했다가 다른 약 처방했다가 하는 어의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절대로 못 믿지. 하지만 영조 본인도 어느 정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 비전문가이면서 어의의 처방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상극인 처방을 강행한 점이다. 심지어 이러면서 한 말이 "내가 의술은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기운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라고. 그렇지만 독살설을 제기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 떡밥은 正祖 독살설만큼이나 당시에는 퍼져 있었던 이야기로 영조연간에도 역모로 친국을 받던 죄인이 "신은 갑진년(영조 즉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이외다."라고 영조의 면전에서 대놓고 디스를 했다는 기사가 실록에도 나오며, 조선왕조 5백년에서는 궁녀 몇명이 어린 사도세자(최수종 분)에게 이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고 이 궁녀들이 친국들 당하는 것을 사도세자가 훔쳐보다가 사건의 진상을 아는 것으로 처리했다.
그의 죽음과 경종이 죽기 직전에 벌어진 행동으로 비주류로 몰린 소론과 남인 세력 등에게 큰 떡밥이 되었고 영조는 즉위 내내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역설적으로 영조가 한솥밥 먹던 노론에 의지하게 되어 말기에는 노론이 득세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한 대표적인 사건이 이인좌의 난과 사도세자의 변. 그리고 현재까지도 세간에는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죽는다는 속설이 퍼지게 되었다..
여담으로 그의 두 아내들은 꽤 팔자가 사나운 편이다. 첫 아내 단의왕후 심씨는 요절했는데, 그녀의 집안은 후에 이인좌의 난에 참가하는 바람에 몰락했다. 두번째 아내 선의왕후 어씨는 일찍부터 영조를 경계했다. 심지어 경종이 후사가 없자 다른 왕족을 양자로 들여 경종의 뒤를 잇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이 탓에 영조와 사이가 나빠서 영조가 즉위한 뒤에 둘이 서로를 무시하는 일이 잦아 난감한 일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영조의 장자 효장세자를 그녀가 독살했다고 하기도 한다.
능은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懿陵. 아래쪽에 선의왕후 어씨가 묻혀 있고 위에 경종이 묻혀 있다. 경종은 죽어서도 참으로 안습했는데 이 자리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섰을 때 중정 직원들이 능 앞에다 자기들 놀이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농담 아니고 정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덤앞에다 연못과 계곡을 만들고 거기다가 비단잉어를 풀어놨다 실제로 연못을 밀어내기전만 해도 懿陵 매표소에서는 잉어먹이를 팔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다 밀어냈다. 현재 이 자리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있으며 옛날 중앙정보부의 강당으로 쓰던 건물이 남아 있다. 이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고 여기서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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