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일본왕은 백제출신인가?
친가유
2009. 4. 4. 05:53
일본왕은 백제출신인가?
일본의 천황릉인 인덕릉 동경에는 주목할 만한 문양이 하나 있다. 바로 태양의 중심에 산다는 세발 달린 새다. 이것은 동경이 소장되어 있는 보스턴 미술관의 소개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 천황들은 새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것은 각종 역사 기록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중에 왕의 뒷머리에 꽂혀있었던 금제 뒤꽂이가 있다. 얼핏 보면 단순히 삼각형 문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발 달린 새의 형상을 하고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것으로 보이는 두 켤레의 금동제 신발이 발견됐다. 그런데 그 중 왕의 발쪽에 놓여있던 신발에서는 세발 달린 새들이 여러마리가 발견된다. 육각형의 구갑무늬에는 세발 달린 새가 각각 한 마리씩 들어 있다. 그 뿐이 아니다. 거울과 함께 왕권을 상징하는 무령왕의 환두대도에서도 금동제 신발에서와 똑같은 모양의 새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인덕릉에서도 무령왕의 칼과 동일한 모양의 칼이 출토되었다. 인덕릉 환두 손잡이의 위아래 손잡이의 양쪽에는 무령왕의 칼과 마찬가지로 위아래로 모두 새가 투각돼 있다. 두 칼 모두 뱀을 상징하는 무늬가 일치된다.
환두라는 것은 중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지만 이것은 철제다. 전부 철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백제나 신라에서 발달된 것은 칼날 부분은 물론 철제지만 손잡이 부분은 동제품에 금도금을 한 것이다. 그리고 칼잡이와 칼날 사이에 도나츠같은 부분에 용이라든가 하는 조각을 넣는다. ...... 이러한 것은 지금 현재 중국대륙에는 없다. 있는 곳은 한반도와 5세기 이후의 일본, 그 중에서도 무령왕릉과 인덕릉의 것은 대단히 가까운 것이다.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단히 닮은 것이다.
백제와 일본 천황과의 관련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또다른 유적이 남아있다. 바로 일본 아스카에 있는 오미아시 신사다. 안내간판에는 말을 전해준 백제인 아지사주의 후손인 야마토노아야씨의 본거지였다고 적혀있다. 뒷편에 있는 9층 석탑은 백제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신사에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이곳이 센카 천황의 궁터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백제계 세력의 본거지에 일본 천황의 궁터가 있었다는 말이다.
백제계와 천황과의 관련성을 더욱 분명히 해주는 유적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7세기 중엽에 천황이 스스로를 백제인이라 자처했던 기록이 나온다. 그가 바로 백제대사를 지은 서명천황이다. 그는 639년에 야마토의 중심부를 흐르는 강을 백제천이라 이름짓고, 서쪽의 백성들은 궁을 짓게 하고 동쪽의 백성들은 절을 짓도록 명했다.
640년 겨울 10월, 백제인 서직현이 조영을 책임졌던 백제궁이 완성되었다. 거처를 옮긴 서명천황은 이듬해 겨울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궁 북쪽에 빈궁을 지어 천황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람들은 이 궁을 백제의 대빈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제천이 흐르는 땅에서 백제인이 세운 백제궁에 살다가, 죽어서는 백제 대빈에 안치된 서명 천황. 우리는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일본 문헌사학계 최고의 권위자 중 한사람인 이노우에 히데오는 그동안 우리가 일본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왜'라는 성씨를 통해, 백제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냈다.
이노우에 히데오 "왜의 인명에 관해서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집중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흥미있는 것은 이들 인명이 신화시대에는 천황의 이름과 그 일족들에게 사용되었다. 전설시대에 오면 야마토 지방, 즉 나라현에 살고있던 귀족, 호족들에게 사용되었다. 역사시대에 오면 도래인들에게 주는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것으로 보면 천황계와 도래인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한 걸 알 수 있다. ......."
백제인들을 지칭하는 왜라는 성씨를 썼던 천황과 그의 자식들이 스물 세명에 이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얼 말하는 것인가? 이것은 양국의 관계가 단순히 선진 문화를 전해주어서가 아니라, 당시 일본의 천황가가 바로 백제계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