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 추모 시설·기념물

함준호장군 현충비

친가유 2013. 8. 26. 15:57

함준호장군 현충비

 

 

 

 

 

 

우측면

 

 

본 비석은

함장군이 전사한 서울특별시 성북구 수유동116변지의 1에

현지주민과 동지일동의 주선으로 그 전공을 추모하기위하

여 건립한것인데 주변이 주택가로화하여 부득이 1966

년 5월 23일 이곳 국군묘지에 이천한것이다.

 

 

 뒷 면

 

嗚呼라 祖國守護의 英魂이 여기에  잠드나니 故咸俊鎬將軍은 生을 서울에서 받아 法學에 뜻을 두고

京城法專에서 硏學하다가 祖國光復을 맞음에 勇躍 國防警備隊에 入隊하여 智異山地區戰鬪司令官

으로서 共匪討伐에 赫赫한 功을 세웠으며 共産傀儡軍이 不意의 南侵을 恣行하자 故人은 第七師團

第一聯隊를 指揮하여 首都서울 防衛전에 勇戰奮鬪하였으나 衆寡不足 檀紀四二八蔘年六月二十七日

뒤따르는 部下와 함께 여기에서 壯烈한 죽엄으로 그 生을 祖國에 바쳤으니 哀惜하도다 故人이 남

기신 崇高한 愛國之誠을 기리 顯忠하여 여기에 碑를 세우노라

 

                          檀紀 四二九一年六月二十七日

                         故咸俊鎬將軍顯忠事業會發起人

                                                           當時師團長     陸軍中將  劉載興

                                                           當時副聯隊長  陸軍准將   李喜權

                                                           白雲義塾      豫備役少領  姜義植

 

 

 

<고 함준호장군>

 

 

 

1921년 11월 17일 ~ 1950년 6월 27일

 

6.25전쟁시 창동 전투에서 전사했음.

서울 종로구 출생으로 경기도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으며 재학 중에는 일본인 학생들을 모두 제치고 학생대대장까지 지내고 오늘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해방이 되자 1945년12월 조선학병단을 창설할 때 군사부장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제 말 학병을 다녀 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1946년 2월 참위로 임관된다. 1948년 8월 , 5월 1일로 제5여단에 예속된 제3연대장에 보직되어 10월에 여순 건이 발생하자 부연대장인 송석하 소령의 남원 대대를 진압작전에 출동시켜 여수와 순천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웠다.

 

12월 30일 일단 작전을 종료하고 제15연대와 교대하여 원대로 복귀한 연대는 반란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해

1949년 1월 전주에서 남원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전개, 제14연대의 반란 주모자인 김지회와 홍순석 중위 등 수뇌부 일당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처럼 제3연대장에 임명된 후에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으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고 1950년 4월 30일에는 제5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제7사단 1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50년 6월25일 6.25가 발발하자 미리 예견한 연대장은 관사에 머물다 전황을 보고 받고 동두천 전투를 이끌었다. 전력에서 절대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25일 4시반 시작된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잘 막아내어 오후 17시에야 소요산 일대의 전선을 내준다. 그날 밤 22시까지 동두천에서 시가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으로 연대장은 철수명령을 내려 동두천 남쪽 덕정초등학교로 후퇴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26일 새벽 총참모장이 내린 의외의 반격명령을 받고 08시 2개 대대를 동두천과 봉암리 쪽으로 진격시키게 된다. 그러나 포천 방면으로는 이날 새벽 함께 반격명령을 받은 2사단의 5연대 2개대대, 그리고 곧 도착한 16연대 2개대대가 의정부 바로 북동쪽 축석령에 도착하자마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의정부 함락이 경각을 다투는 시기였다. 1연대는 적이 마침 의정부를 향해 우회하여 지나가는 통에 저항 없이 동두천 일대를 수복(?)하였으나 의미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덕정에 있던 연대장은 13시 의정부 피탈 소식을 듣고 화급히 연대본부가 있는 의정부 직동으로 내려가 14시에 내린 후퇴명령을 접한다.

연대장은 황당하게도 반격부대를 다시 불러야 했다. 

 

의정부를 접수한 적은 의정부 남쪽 백석천과 호원동 일대의 국군 25연대 2개대대와 16연대 혼성대대의 저항을 27일 새벽 완전 돌파한다. 이 동안 적 수중에 떨어진 의정부의 서쪽 외곽을 돌아 26일 밤새워 내려온 반격부대의 후퇴병력을 모아 우이동에서 1연대도 일전을 준비한다.

 

적의 공격이 시작되자 연대장은 오봉산에 후퇴하는 1연대 일부병력을 수습하던 중 수유리 부근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총격을 받고 27일 11시 30분 호위헌병과 함께 전사한다.

 

국군 최초의 연대장 급 전사자 였다. 연대장이 전사한 30분 후 독전대까지 동원했던 창동전선은 맥없이 허물어지고 적은 그날 밤 서울 미아리를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창동은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가 아님).

 

사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고 육군준장으로 추서했으며 현재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 1-7에 안장되어 있다.

 

장군은 서도에도 능하여 경기도립상업학교 재학 시절에는 전국학생서화전람회에서 최우수작품으로 입상될 정도였으며, 특히 중국 서도의 삼성인 구양순의 필치를 능가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지리산공비토벌작전에서도 공비들을 자수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함 장군은 국군에 의해 통비(通匪) 혐의를 받던 자가 스스로 찾아와 “이틀만 석방해주면 국군이 탈취당한 무기를 찾아오겠다”하자 그를 풀어주었다. 이틀 후 그는 탈취한 무기와 함께 빨치산 16명을 연대 CP로 데려왔다. 이유를 묻자 그는 “함 장군의 말씀과 어진 성품에 감복하여 자수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