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탄 10 용사 현충비
육탄 10용사 현충비
남북이 38선을 경계로 대치된 상황에서 1949. 5. 4. 북한공산군에게 불법 점령당한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포탄을 안은채 적진지에 뛰어들어 진지를 분쇄하고 산화한 10명의 용사(서부덕 소위,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박창근 상사)가 제6묘역 맨 앞줄에 안장되어 있다.
이들 10용사의 명복을 빌며 위훈을 추모하고 그 뜻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육탄10용사 현충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하단의 기단석 위에 5층의 탑을 쌓은 듯한 형상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는데, 제일 하단에는 비문, 그 위에는 ‘THE TEN BRAVE WARRIORS’라는 영문표기, 그 위에는 10용사의 계급과 성명 그리고 제일 상단에는 육탄 10용사 현충비라는 비명이 각각 새겨져 있다. 비의 높이는 6m, 폭은 상단 0.5m, 하단 2.3m, 바닥면적 89.8㎡이다.
이 비는 육탄 10용사가 산화할 당시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이 앞장서고 개성 독지가, 일반유지 등이 “10용사 현충비 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건립한 비로서 1955년 3월 중순 국방부의 지원으로 기초 공사에 착공하여 동년 4월 하순 준공하고 5월 4일 전몰일을 기하여 제막하였다. 비의 전면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비문>
해방이후 三八선으로 말미암아 국토가 분단되어 오전중 단기 四二八二년에
이르러서는 개성서 북방 송악교지에 공산괴뢰군이 불법 침입하여 방위가 불
리하고 개성이 위태오우매 동년 4월 4일 제一사단 제十一련대 소속 서부덕
소위이하 9명의 용사 화랑정신을 받아 조국애와 민족정기에 불타는 정열로
몸에 포탄을 지니고 적의 지하 참호속에 뛰어들어 육탄 혈전 적진을 분쇄하고
옥으로 부서시니 멸공전사상에 이룬 공과 그 용명이 널리 세계에 펴지다. 굉음
이 흘러도 잊음 없이 명복을 빌고 그 영령을 추모하고저 이에 눈물과 정성으로
현충비가 서나니 이는 조국수호의 정신을 청사에 새기고 만대에 전함이라 十
용사의 영혼불멸하여 겨레와 함께 살며 길이 빛나리로다.
<建立經緯>
檀紀 四二八七年 五月 四日에 五年前 當日 肉彈十勇士가 散華하였을 때 第一師團長이었던 金錫源 將軍은 顯忠碑 建立을 計劃하고 私財로 碑石을 構入하다.
1. 翌年 三月 十八日에 金將軍의 發起로 關係將星 開城篤志 一般有志 等이 十勇士 顯忠碑 建立委員
會를 組織하여 特志家의 많은 贊助로 建碑에 着手하다.
1. 檀紀 四二八八年 3月 中旬에 國防部의 基礎工事援助로 着工하여 同年 四月 下旬 竣工하고 五月
四日 戰歿日을 擇하여 除幕式을 擧行하다.
<안내문>
광복 후 국토가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분단되어 있던 6·25 전쟁 발발 이전인 1949년 5월 3일 미명을 기해 북한군이 개성 송악산 지역의 우리측 고지를 기습 점령하자, 이튿날 당시 육군 제1사단 11연대 소속 10명의 용사가 이를 탈환하기 위해 폭탄을 몸에 안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산화하였다.
이 비는 죽음을 무습쓰고 적의 토치카를 폭파함으로써 실지를 탈환케 한 이들 10용사의 명복을 빌고 추모하며 그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세운 비이다.
당시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과 개성의 독지가, 일반유지 등이 국방부의 지원 하에 1955년 4월에 준공하고 육탄10용사가 산화한 날인 5월 4일을 기해 제막하였다.
육탄 10용사는 서부덕 소위를 비롯하여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유제룡, 박창근 상사이며, 이들은 제6번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2013년 9월 현충원 좌측 산기슭에 있던 10용사 육탄용사현충비를
현충문 우측 10용사 묘소 앞으로 이전하였다.
이전하고 남은 碑가 있던 臺
이전 공사중
신규 이전된 10육탄 용사 현충비
현충문 오른쪽 10용사 묘역 앞으로 이전하여 세워졌다.
새로 세워진 비문 (내용은 이전의 것과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