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바보 온달. 그는 고구려의 전쟁영웅이었다

친가유 2009. 4. 4. 05:47

 바보 온달. 그는 고구려의 전쟁영웅이었다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들을 모아놓은 삼국사기 열전 충신편.10여명의 충신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런데 여기에 고구려 평원왕대의 인물인 바보온달이 나온다. 평강공주와 결혼한 바보온달. 바보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온달이 왜 충신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일까.

 

단양군의 한 돌무더기에 학계와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적석총 -온달의 무덤이라는 이 돌무더기의 발굴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발굴을 추진한 단양군은 온달의 무덤이 확실하다며 관광자원 개발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온달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돌무더기. 얼핏보면 그냥 돌무더기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돌들이 자연석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다듬은 것이다. 게다가 일정한 형태와 모양을 지닌 돌들이 규칙적으로 포개져 층을 이루고 있고. 아랫부분에는 기단의 흔적까지 보인다. 고구려의 계단식 적석총과 비슷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 또한 옛날부터 이것을 온달의 무덤으로 불렀다고 한다.

 

단양에는 온달과 관련된 유적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온달동굴.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다. 온달과 평강공주가 함께 머물렀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온달이 쉬고 갔다고 휴석동이라 불리는 마을. 이곳에도 온달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을 뒷산에 놓여있는 윷판 바위. 온달이 군사들과 윷놀이를 했다는 곳이다.
단양이 온달의 고장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온달산성에 있다. 온달이 신라군과 싸우다 죽었다는 온달산성은 해발 400m의 낮은 산성이지만 경사가 급하고 험하다. 온달산성은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온달산성은 남한강에 둘러싸여 있어 방어가 용이하다. 강을 이용하는 선박의 출입까지 통제가 가능하다. 또한 성곽이 이렇게 절벽위에 있기 때문에 적의 공격이 어렵다. 방어는 쉽고 공격은 어려운 천혜의 요새인 것이다.

 

중요한 성이었기 때문에 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도 치열했다. 온달산성에는 아직도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산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형태의 돌들이 눈에 띈다. 냇물에 의해 마모된 강돌이다. 전투시 성벽 아래에 떨어뜨려 적에게 타격을 주는 고대전투에서 위력적인 무기다. 신라에서는 돌팔메질을 전문으로 하는 군대가 있었다.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게 되면 신라에게 빼앗긴 국원성 충주일원 회복이 가능하고 남한강 상류지역이 모조리 고구려의 땅이 될 수 있는 것이 영춘 일대의 온달성일원이다. 계속 남쪽으로가면 죽령로 간다. 풍기쪽으로 장악한다. 온달성이 떨어지면 그 일대가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게된다. 그 중요한 루트를 지켜주는 것이 온달성이다.

 

온달도 이를 위해 출병하지만 아단성, 즉 온달산성아래에서 전사한다. 그러면 아단성이 왜 온달산성인가.
동국여지승람은 단양 영춘면을 고구려의 을아단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도 영춘면을 을아단현으로 표현한다. 단양군 영춘면의 옛지명이 바로 아단현인 것이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영춘현의 고지도에 나타나는 고성. 온달산성이다.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산성을 쌓고 신라군과 싸운 곳이라는 기록도 보인다.

 

온달산성이 온달의 전사지라는 것은 계립현의 위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계립령은 단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강수로와 낙동강수로를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달은 591년 계립령과 죽령의 서쪽 땅을 되찾기 위해 출병한다. 계립령은 고구려가 남진정책으로 확보했다가 551년 한강유역상실후 신라에게 다시 뺴앗긴 곳이었다. 그로부터 40년후 온달이 회복을 시도한 것이다. 6세기 고구려와 신라는 계립령과 죽령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다.

 

온달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을 초월해 평강공주와 결혼한 온달. 온달은 어떻게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

 

고구려의 평원왕이 그 실마리를 쥐고 있다. 온달을 사위로 맞은 평원왕은 559년 즉위한다. 평원왕은 장수왕이후 계속된 왕위쟁탈전과 귀족세력간의 갈등 후 혼란속에 즉위한 왕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후 고구려는 극심한 내분을 겪는다. 22대 안장왕이 피살되는가 하면. 이어지는 안원왕때는 554년 외척간에 대대적인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2천여명이 사망한다. 그리고 평원왕의 아버지인 양원왕 557년에는 고구려 역사상 최초의 반란인 간주리 반란사건까지 벌어진다.

 

고구려는 장수왕때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평양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평원왕은 아버지 양원왕에 이어 평양성의 내성인 장안성을 축조해 외적의 침입을 막는 한편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왕권강화를 도모한다. 가뭄이 들자 장안성 공사를 중단하고 스스로 끼니를 줄이기도 했다. 또한 전통적인 고구려 귀족대신 신진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해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는다. 장수왕이후 등장한 신진세력은 거문고를 발명한 양원왕대 인물인 왕산악과 왕고덕. 영양왕대 을지문덕등이 확인된다. 평원왕대에 활동한 온달도 이때 등장한 신진세력인 것이다.

 

그러면 온달은 어떻게 신진세력이 될 수 있었나, 당시 고구려사회는 무예를 중시했다. 뛰어난 무예실력과 전쟁에 출정해 공을 세우는 것은 출세의 중요한 통로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달은 매년 3월 3일 낙랑의 언덕에서 벌어지는 사냥대회에 참여한다. 여기에서 온달은 가장 많이 사냥하고 남보다 뛰어나 주목받기 시작한다. 사냥대회가 인재등용의 장이었던 것이다.

 

사냥대회를 통해 신진세력으로 떠오른 온달. 그러나 그는 중국 후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후에야 비로소 왕의 사위로 인정받게 된다. 삼국사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내어 요동에 쳐들어오자 온달이 선봉이 되어 크게 공을 세우니 여러군사가 기세를 타고 맹렬히 싸워 크게 이겼다. 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온달은 신진무장세력의 대표로 떠오르면서 사위로 인정을 받는다. 온달이 전쟁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인 무장세력이 된 것이다.

 

당시 고구려사회에서는 뛰어난 무예실력과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것은 출세의 필수조건이었다. 이를 갖춘 온달은 신진귀족을 통한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배경속에서 왕의 사위로 인정받고 중앙정치세력의 중심에 나서게 됐다.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인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은 이런 정치적 상황떄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삼국사기-" ( )立峴 竹嶺以西 / 不歸於我 則不返也"
평원왕 사후 온달은 신라와의 대대적인 전쟁에 총사령관으로 나선다. 온달은 출병전에 `계립령과 죽령이서를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밝힌다. 온달이 회복하고자 했던 계립령과 죽령이서 10군. 과연 이 땅은 어떤 땅이길래 온달이 목숨을 건 출사표를 던졌을까?

 

온달은 출병전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라가 한수 이북을 침탈해 자기 땅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통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번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온달은 이 땅에 왜 이렇게 집착했을까. 그 해답은 4세기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대대적인 남진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396년에 백제로부터 남한강 상류의 58성 700촌을 획득한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기록돼 있는 58성중에는 온달산성인 아단성도 포함돼 있다.

 

이때 고구려는 신라땅 깊숙히 침투해 100년이상 영향을 미친다. 남한강상류를 점령한 고구려는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하는 관문인 충주를 남진경영의 중심으로 삼는다. 국원성이라는 것은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과 동일한 지명, 고구려의 별도가 부소가 충주가 되는데 충주에서 단양쪽으로 죽령을 넘어 고구려 군대가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남진경영을 관장하는 총 본영이 충주이고 충주의 날개역할을 하는 전초기지가 단양이다.

 

그런데 6세기 중반 신라의 반격이 시작된다. 고구려가 귀족간의 갈등과 중국 북방민족과의 전쟁에 휘말려 있는 사이 한강유역을
공격한 것이다. 551년 고구려는 결국 신라의 거칠부에게 죽령이북의 10군을 빼앗긴다. 그후 고구려는 실지회복을 염원하지만 이뤄지지 않는다. 내부의 정치적 혼란이 계속됐고 신라가 한강유역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격퇴될 때 사정이 있었지만 수복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 삼국사기에는 여러군데 보인다. 그 숙원사업을 온달이 마감하고자 했다. 그래서 온달이 죽령과 계립령 이북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출정을 결심하게 되고 그런 여망을 수행하려다 전사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와 신라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온달산성, 충주, 중원지역을 확보하고 소백산맥이남으로 진출해 신라군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하는 관문이었다. 서울 한강하류를 거쳐 충주에 이르는 길은 신라의 주력군이 방어하고 많은 방어시실이 있고 한강넓은 지역을 도강해야하는 어려움이 있고. 반면 강원도 내륙으로 우회하는 그런 위험이 덜할 뿐 아니라 신라의 주력을 피해 신라의 후방을 공격 허점을 노릿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죽령과 계립령을 통과해서 한 강하류로 연결되는 신라의 보급로를 차단해서 한강하류의 신라군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 온달이 이길을 선택한 것은 경주에서 남천주로 이어지는 신라의 방어체계를 갈라놓고. 한강유역을 지키는 신라를 배후에서 압박 고립시키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온달은 온달산성에서 최대의 고비를 맞게되고.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고구려의 염원을 안고 출정한 온달. 온달은 고토회복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일까. 온달이 상당한 영역을 회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당의 사신인 현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할 당시 신라가 우리땅 500여리를 빼앗았다. 수의 침입전에 누군가가 500여리를 확보한 것이다. 

 

수의 침입기는 598년과 612년에서 614년. 그런데 온달이 590년에 출병한다. 수의 침입기전에 고구려와 신라사이에 전쟁이 없다면 500여리는 온달이 확보한 것이 된다. 삼국사기를 확인했지만 대규모 전쟁과 실지회복 기사는 없었고 온달이 출병한 것이 유일했다. 500여리를 확보한 것은 온달이 분명한 것이다.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리라는 염원을 안고 온달산성에서 최후를 맞은 온달. 그는 계립령과 죽령이서의 500여리를 회복했던 것이다.

관앞에 공주 온달이 죽자 시신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죽고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그만갑시다라는 말을 듣자 관이 움직였다.

 

"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그만 갑시다. 장군."

사랑하는 평강공주의 간절한 호소에 그제서야 관이 움직였다는 이야기속에서 죽어서라도 고구려의 땅을 지키겠다는 온달의 강렬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고구려의 옛땅를 회복하자는 원대한 목표를 함께 나누고 이를 위해 희생과 고통을 감내한 온달과 평강의 고귀한 사랑. 이속엔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물론 당시 고구려 사회의 정치적인 상황이 담겨 있다. 외적의 침입과 귀족사회의 내분을 수습하고 마침내 빼앗긴 영토 회복에 나서는 6세기 고구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가난과 신분을 뛰어넘은 온달. 그는 신분상승에 대한 고구려 민중들의 열망을 대변하는 인물이었고 북방민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대제국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나선 고구려인들의 국민영웅이었다. 당대 고구려의 꿈이자 희망이었던 바보온달. 평강공주와의 사랑이야기와 그의 비장한 최후는 지금까지도 그를 사랑받는 설화의 주인공으로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