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설을 통치수단으로 이용한 영조… 뱀 나온다고 고조부 인조의 무덤 옮겨
풍수설을 통치수단으로 이용한 영조…
뱀 나온다고 고조부 인조의 무덤 옮겨
'사변(蛇變)'이란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영조 7년(1731년) 3월 16일 갑자기 파주 운천리에 있는 인조의 무덤(長陵·장릉)을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나온다. 능침에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이유였다. 며칠 후 우의정·예조판서 등이 현장을 다녀와서 임금에게 "큰 것은 서까래만 하고 작은 것은 낫자루만 한 뱀 아홉 마리가 능침에 있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보고한다. 또 "풍수에서 꺼려 하는 일로 천릉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5개월 후인 8월 말에 교하로 옮긴다(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인조가 묻힌 지 80년 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왕릉뿐만 아니라 명당으로 알려진 터는 햇빛이 잘 드는 곳이다. 뱀들의 겨울나기뿐만
아니라 체온을 높이기 위한 일광욕에 좋은 자리이다. 길지로 알려진 묘들을 답사하다가 가끔 보는 것이 뱀이다. 장릉에 출몰하는 뱀을 영조 임금은
"더러운 물건(穢物·예물)"으로 표현했지만 풍수책에 따라서는 세 가지 상서로운 것(三祥瑞) 가운데 하나인 '구사(龜蛇·거북과 뱀)'로 보기도
한다. 또 '사변성룡(蛇變成龍·뱀이 변하여 용이 됨)'이란 사자성어처럼 뱀은 귀하게 될 전조라고 말할 수 있다. 꺼림칙하면 멀리 내다버리면 될
일이다. 뱀을 핑계로 갑작스러운 천릉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조는 왜 장릉을 옮기려 하였을까? 그것도
아버지(숙종)·할아버지(현종)의 무덤이 아닌 고조부 인조의 무덤을? 그건 바로 왕위의 정통성 확보를 위함이었다.
영조의 어머니(숙빈
최씨)는 무수리(하녀) 출신이었다. 여기에 영조가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하고 임금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한
반란(이인좌의 난)도 일어났다. 영조는 왕위 정통성에 관한 심각한 콤플렉스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이런 상황을 헤쳐나갈 방안이 절박했고,
그가 택한 것이 바로 어머니 숙빈 최씨의 지위를 높이는 이른바 사친추숭(私親追崇)이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사친추숭을 할 것인가.
아무리 왕이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일. 그는 고조부를 떠올렸다. 고조부 인조도 삼촌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되었다. 그도 왕위의
정통성에 찜찜한 부분이 있었다. 왕위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인조는 돌아가신 아버지(정원군)를 왕으로 추숭하고 그 무덤을 김포로 이장하여
왕릉으로 부르게 하였다.
장릉을 옮겨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한 영조의 의도는 분명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인조의 사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즉, 조정 대신들뿐만 아니라 온 백성이 인조의 예를 본받아 어머니 숙빈 최씨의 추숭을 알아서 하라는 암시였다. 실제로 장릉(長陵)
천릉 이후 숙빈 최씨를 모시는 사당은 육상궁(毓祥宮)으로, 묘는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된다.
최근까지 인조가 처음 묻힌
초장지(初葬地)의 위치에 대해서는 설들이 구구하였다. 그런데 지난해(2014년) 차문성 연구원(파주향토문화연구소)이 인조 초장지를
비정(比定·고증을 통해 찾아냄)하여 학계에 보고함으로써('민족문화' 제44집)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게 되었다. 17세기 양식의 왕릉 석물
파편들이 고증의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초장지터(파주시 문산읍 운천2리)에는 현재 세종의 손자 의인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1969년 이곳으로
이장). 터가 길지였기에 다시 무덤으로 활용된 것이다. 결국 '사변(蛇變)'은 통치 수단으로 풍수설을 이용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