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시절

6.25 전후 희귀 사진들

친가유 2015. 1. 2. 22:59

6.25 전후 희귀 사진들

 

 

 

 


 

여수 순천 반란을 진압 후 여수 시내 풍경. 놀랍게도 단 일주일 동안 무려 2.50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1948년 10월에 발생한 이 사건은 남노당 중앙에서 지령을 받은 부대 내 공산주의 병사들이 지역 남노당원들과 합세 군을 장악한 후 지역 좌빨 학생들과 규합 여수를 접수하고

그 여세를 몰아 순천까지 인공기가 걸리고 독립(?)한 폭거가 요지이다. 이들이 발표한 성명서에는"제주 출동 반대,미군 철수, 인민공화국수립 만세" 등 요즘도 듣는 낯익은 구호들이었다고 한다.


검거된 좌빨 학생들. 중고딩 또래로 보인다 .지역 좌빨학생 600명으로 인민의용군을 결성 맹할약을 했다고 한다.

특히 여학생들은 치마폭에 총기나 수류탄을 숨겨 군인들을 유혹해 사살하는 미인계를 쎴다.

이들 어린 놈들의 잔인성은 어른 반란군도 혀를 찼다고 한다.




검거된 반란군.



반란군도 군복을 입고 있어 유일한 식별법으로 헬멧에 하얀 밴드를 둘러 아군끼리에 오인 사격을 방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지역 무기고가 털려 놈들의 화력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진압 후 노획한 총기류가 1개 사단이 무장 할 수 있는 12.000정이 넘었다고 하니 엄청난 거다.

좌빨에게 죽임을 당한 한 사내의 시신 앞에 오열하는 그의 아내와 어머니.


반란군에게 학살당한 군경 시신들. 장교들은 전원 죽이고 전향하지 않는 병사들은 무참히 기관총, 칼 ,몽둥이 ,죽창 등으로 죽였다고 한다.


거적에 싸여 매장을 기다리는 희생자들.


트럭에 실려 후송을 기다리는 반란군들. 곧 죽을 운명인 걸 알면서도 카메라를 향한 눈빛만큼은 살기등등하다.






서을 수복 시가전.


미공수대원이 김일성 초상화에...


1950년 10.24 미24사단이 대전에서 발견한 북괴군에 학살당한 약 400명의 양민들.


후퇴하는 북괴군에게 손을 뒤로 매인체 사살당한 미24사단 포로. 한국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단지 조국의 부름을 순종해 낯선 땅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은 젊은 이들을 결코 잊어서는안된다.


눈속에서 사살된 사람. 숨구멍에 의해 구멍이 생기고 본능적으로 살려고 눈을 헤쳐 나온 의지의 손이 슬프다.



국군들에 의해 사살되는 빨치산들. 제네바협정상에 무장한 민간인 즉 게릴라의 약식 처형은 적법한 거다.

그리고 우리군이 설사 국제법상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2차대전 때 소련군과 연합군들도 독일군이나 민간인을 학살 등 잔학행위를 했지만 재판은 커녕 조사조차한 적이 없다.

독일은 침략 당사국이며 먼저 잔학행위를 했기 때문에 보복 차원에서 맞대응한 걸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국군도 마찬가지 논리이다.

한편으로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저 전쟁터의 병사들이 겪는 분노, 좌절, 공포, 죽음, 전우애, 희망, 절망 등을 논단한다는 게 참으로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1950년1 2월 8일 평양을 앞에 두고 어느 도시에서 인민군 포로를 연행.


1950. 8. 25 서울 용산 근처에서 한밤중에 북게릴라들에게 습격당한 한 가족으로 보이는 피난민 대열.


미군에 투항하는 인민군들.


탱크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 직전인 다리.



1953년 부산. 구걸하여 연명하는 피난민 부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고 전몰병사들 희생에 무한한 경의와 애도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