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사~만주국 황제 푸이(2)

친가유 2014. 10. 25. 18:18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사

만주국 황제 푸이(2)

  

   

   

      

    

  

청 태조 첫 깃발 날린 푸순서 ‘전범 수감’된 마지막 황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김명호 20140831 입력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후였던 완룽(왼쪽)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자금성 시절 영어 가정교사와 함께 한 완룽. 연도 미상. [사진 김명호]

 

2012년 봄, 성을 청(程)씨라고 밝힌 노인이 창춘의 허름한 빵집에서 62년 전에 겪었던 일을 회상했다. “1950년 8월 3일 동틀 무렵, 중·소 국경마을 수이펀허(綏芬河)엔 전운이 감돌았다.

 

당시 나는 21세, 동북 인민정부 외사국 간사였다.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역에 도착해보니 새벽 4시였다. 사방에 매복을 끝내고 무장 병력을 철로 변에 배치한 후 전투 태세를 선포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밤안개가 짙었다.”


노인의 회고는 그칠 기색이 없었다. “6시 무렵, 소련 방향에서 울리는 기적 소리가 정적을 깼다. 육중한 열차가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자 다들 긴장했다. 객차 문이 열리고 무장한 소련 군인들이 먼저 내렸다. 잠시 후, 키가 1m70㎝ 남짓한 40여 세 정도의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색 양복에 검은 테 안경, 손에는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공포에 질린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한눈에 누구인지를 알아봤다.”

일본을 방문한 푸이는 천황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열병식에 참석하기 위해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으로 향하는 푸이(앞줄 오른쪽)와 히로히토. 1935년 4월 9일 오전.
상부의 지시를 받고 현장에 나와있던 푸순(撫順)전범 관리소 간호사도 훗날 구술을 남겼다. “그는 만주국 황제 시절에도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1938년, 33세의 푸이가 선양을 방문했을 때, 나는 만주국 기와 일본 깃발을 들고 환영 대열 맨 앞에 서있었다. 고관들이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 숙이는 것을 보고 황제가 어떤 존재인지를 실감했다. 어릴 때부터 사진이나 초상화로 보아온 위엄있고 화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으며, 한때 일본 천황과 나란히 마차에 앉아 도쿄 한복판을 질주했던 사내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팠다.”

동북 인민정부 측에 신병이 인도된 푸이 일행은 중국 열차로 갈아탔다. 푸이와 함께 송환된 공친왕(恭親王) 손자의 구술이 흥미롭다. “중국 기차에 올라탄 우리는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염라대왕의 심부름꾼이 주변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입이 얼어 붙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푸이는 사색이 돼 있었다. 자신이 1급 전범인 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형장으로 직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선포한다. 이제 너희들을 포로가 아니다. 전범죄로 모두 체포한다. 나는 저우언라이 총리의 지시에 의해 너희 일행을 조국으로 안내하러 나왔다. 우리 당의 정책과 인민정부를 믿어라. 학습에 매진해서 사상을 개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기 바란다.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를 불러라.” 전범 선언과 동시에 손발이 묶일 줄 알았던 푸이 일행은 반신반의했다. 의심이 많던 푸이는 말이 저렇지 그럴 리가 없다며 믿지 않았다.

선양(瀋陽)에 도착하자 인솔자가 푸이와 전 만주국 총리 장징후이(張景惠·장경혜)를 호명했다. “따라와라. 만날 사람이 있다.”

밖으로 나온 푸이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줄 알았다. 조카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희들까지 죽일 심산이구나. 우리 모두 조상을 만나러 가자”며 앞장섰다. 건물로 들어서자 큰 탁자에 과일·사탕·빵·담배 등이 놓여 있었다. 푸이는 “내 생각이 맞았다. 마지막 음식이니 실컷 먹자”며 닥치는 대로 입에 쑤셔 넣었다. 중국은 사형 집행 직전에 한바탕 먹이는 전통이 있었다. 키 크고 안경 낀 사람이 나타났다. 수행원이 가오강(高崗) 주석이라고 해도 푸이는 먹기를 그치지 않았다. 당시 가오강은 동북 인민정부 주석과 중공 동북국 서기, 동북군구 사령관을 겸한 동북의 최고 통치자였다.

가오강이 입을 열었다. “5년 만에 돌아왔으니 우선 쉬고 학습을 받도록 해라.” 푸이는 듣는 둥 마는 둥, 사과 씹는 소리만 요란했다. 가오강이 귀국 소감을 묻자 먹기를 그치고 쏘아 부쳤다. “소감은 무슨 놈에 소감. 이왕 갈 거, 먹을 만큼 먹었으니 빨리 가자. 형장에 가기 전에 판결서나 보자.”

갑자기 장내에 웃음이 터졌다. 가오강도 웃고 수행원들도 웃었다. 웃기를 그치자 가오강이 푸이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라. 두려워할 필요 없다. 일단 푸순에 가서 쉬도록 해라. 선양에는 적합한 장소가 없다.”

가오강은 푸이에게 황후 완룽(婉容·완용)의 소식도 전했다. “4년전 옌벤(延邊)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선족 부부가 정성을 다해 돌봤지만 전쟁 중이라 치료가 불가능했다. 유골을 찾으면 우리가 잘 보관했다가 돌려주마.”

푸순의 전범관리소에 수용되던 날, 푸이의 심정이 어땠을 지는 알 길이 없다. 푸순은 3백여 년 전, 푸이의 조상인 청 태조 누르하치가 처음 깃발을 날린 곳이었다

 

세번째 부인 사망 뒤 가난한 국수집 딸 점찍은 푸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김명호 20140907 입력  

 

 

세번째 부인 사망 뒤 가난한 국수집 딸 점찍은 푸이

 

만주국 황제 시절 일본을 방문해 총리 관저에서 열린 환영 만찬장에 도착한 푸이. 1945년 4월 8일 도쿄. [사진 김명호]

 

1957년 2월 8일 오후. 20세 후반의 여인이 푸순(撫順)시의 허베이(河北)구 인민법원 문전을 서성거렸다. 위병소에 근무하던 해방군 전사가 42년 뒤 그에 대한 구술을 남겼다.


“나이를 측정하기 힘들었다. 가끔 하늘을 쳐다보며 뭔가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혼 수속을 밟으러 왔다기에 제1 합의실로 안내했다. 어깨가 축 늘어지고 발걸음도 무거워 보였다. 리위친(李玉琴·이옥금)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날 따라 법원장이 직접 여인과 마주했다. 평소 하던대로 인적 사항을 물었다.

“이름은?”
“리위친.”
“별명이나 아명이 있으면 말해라.”
“한때 푸웨이칭(溥維淸·부유청)이란 이름을 사용한 적이 있다.”
“연령과 직업은.”
“나이는 28세, 창춘(長春)시 도서관 관원이다.”
“용건은.”
“푸이(溥儀)와 이혼하려 한다.”

익숙한 이름을 들은 법원장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앞에 앉은 여인을 넋나간 사람처럼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복장은 소박했지만 용모가 수려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빤히 쳐다봐도 리위친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남편의 신분을 말하라고 하자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본명은 아이신줴뤄(愛新覺羅 애신각라) 푸이. 나이는 51세, 만주족이다. 황족 출신으로 청나라 황제와 만주국 황제를 역임했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수준은 10년간 사숙(私塾)을 다닌 사람보다 높다. 외국어 구사능력도 뛰어난 편이다. 수학은 백치에 가깝다. 현재는 전범 관리소에서 개조 교육을 받고 있다. 아직은 미결수라고 들었다.”

법원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결혼을 언제 했는지 물었다. 1943년 3월이라고 하자 그간 이혼을 요구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냉정함을 잃지 않던 리위친은 한바탕 훌쩍거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푸이와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이 차이가 많고 자원해서 한 결혼도 아니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 이혼하고 싶다. 그간 남편 때문에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 푸이와 그의 가족들은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남편이 황제 시절에는 감히 생각도 못했고, 지금은 전범관리소에 수감 중이라 이혼얘기를 꺼내기 힘들었다. 희생만 하라고 태어난 인생은 없다. 법원 문 앞에 와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창공을 휘젓는 새를 보고 들어올 결심을 했다. 며칠을 살아도 새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 법원이 판단해주기 바란다.”

리위친은 정식으로 소송장을 제출하고 창춘으로 돌아갔다. 법원 측은 인민 배심원을 선정했다. 배심원들은 리위친의 행적을 탐문했다.

1942년 여름, 푸이의 세번째 부인인 귀인(貴人) 탄위링(譚玉齡·담옥령)이 세상을 떠났다. 관동군 참모부는 푸이의 일본여인 중에서 새로운 신부감을 물색했다. 사진들을 건네며 선택을 청했다. 푸이는 자신의 사생활이 일본인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다. “탄위링의 시신이 채 식지 않았다. 당분간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푸이의 속내를 읽은 관동군은 중국인 중에서 후보자를 찾았다. 창춘의 난링(南齡)여중 교장에게 예쁜 여학생 사진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일본인 교장은 한 반에서 3명씩 골라 사진관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 여학생들은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이유가 어떻건 무조건 따라 나섰다. 워낙 맛이 없어서 하루에 열 그릇 파는 게 고작인 국수 장수 딸 리위친도 머리를 예쁘게 빗고 사진기 앞에 섰다.

푸이는 리위친의 이 사진 밑에 방점을 찍었다.
60여장의 사진을 만지작거리던 푸이는 리위친이 맘에 들었다. 유모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천진난만하고, 단순해 보인다. 나는 유치한 애가 좋다. 황후 완룽(婉容 완용)처럼 집안 좋고 똑똑한 여자는 싫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여자가 필요하다.”

몇 주일 후, 두 명의 일본인이 통역을 데리고 리위친의 집에 나타났다. 리위친의 엄마는 남편이 사고라도 친 줄 알고 안절부절했다. 일본인들은 리위친의 엄마부터 안심시켰다. “경사가 났다. 딸을 궁궐로 데려다 공부시키라는 황제폐하의 어명이 내렸다.” 옆에 있던 리위친이 끼어들었다. “학비가 비쌀텐데, 우린 돈이 없어요.” 걱정 말라고 하자 질문을 계속했다. “대학 진학도 가능한가요? 집에서 다닐 수는 없나요?” 일본인들은 뭐든지 가능하다며 리위친의 손을 끌었다.

푸이는 리위친을 복귀인(福貴人)에 봉했다. “앞으로 무슨 불길한 일이 생겨도 문제없다. 네 福자 덕에 화를 면할 수 있을 테니 두고 봐라.”

리위친은 집안이 워낙 가난하다 보니 복귀인 칭호를 받고도 사람 대접을 못 받았다. 푸이도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영원히 변할 수 없다며 21개 조항을 제시했다. 두 사람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노예 취급받던 리위친, 전범 신세된 푸이에게 ‘한방’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김명호 20140914 입력  

 

전범 푸이는 황제 시절 학대했던 네번째 부인 리위친이 면회 오는 것을 좋아했지만 결국은 이혼당했다. 붓으로 자술서를 쓰는 푸이. 1954년, 푸순(撫順). [사진 김명호]

 

만주 꾸냥(아가씨라는 뜻의 중국어, 姑娘) 리위친(李玉琴·이옥금)은 15세 때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부의)의 선택을 받았다. 공부시켜 준다는 말만 믿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시키는 대로, 하기 싫은 목욕만 며칠 간 하다가 푸이의 여동생을 따라 황궁 2층으로 올라갔다. 마지막 계단을 밟는 순간, 복도에 키 큰 남자가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일행을 발견하자 황급히 방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여동생이 넓은 방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들어왔다. 방금 전, 힐끗 본 그 사람 이었다. “어깨는 넓고 허리가 가늘었다. 나이는 30 남짓, 복장이 특이했다. 시키는 대로 세 번 절하자 황급히 나를 일으켜 세웠다. 손이 뜨겁다며 불편한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머리가 아프다고 하자 내 이마를 어루만졌다.”

여자 나이 열다섯이면 한창 눈치가 빠를 때였다. 리위친은 이렇게 회상했다.

“푸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자 용기가 생겼다. 밥을 먹었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몇 가지 음식이 나왔다. 아빠가 만든 것보다 맛있었다. 어느 음식점에서 사온 것이냐고 물었더니 웃기만 했다. 허기가 가시자 공부를 어디서 하느냐고 물었다. 좋은 선생을 초청해서 공부하도록 해주겠다기에 혼자 하는 건 싫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편의 유희였다.”

 

  창춘시 도서관원 시절의 리위친. 수감돼 있던

   푸이를 여섯번 면회했다.

푸이는 리위친이 먹기를 마치자 염주를 들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부처님에게 일본 황군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기원해라. 그래야 우리가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만주인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해 있을 때였다. 매일 정오를 알리는 경적이 울릴 때마다, 일본 귀신들을 몰아내 달라고 속으로 기도하는 묵계가 있었다. 일제가 공자 추앙 운동을 전개하자 『논어』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질 정도였다. 리위친은 무슨 말인지 의아했다. 훗날 푸이에게 이유를 물었다. “네가 일본군이 파견한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자 이해가 됐다.

푸이가 “오늘부터 내 방에서 자라”고 하자 리뤼친은 “혼자 있는 게 편하다”며 거절했다. 푸이도 강요하지 않았다. 다음날 인사할 곳이 있다며 유모에게 데리고 갔다. 푸이는 유모 앞에서 어린애 같았다. 유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황상(皇上), 우리 황상” 하며 푸이의 어깨를 연신 쓸어내렸다. 리위친을 소개받자 유모는 인연 타령부터 해댔다.

“딸을 해산한 날 용이 내 젖을 무는 꿈을 꿨다. 친정 엄마에게 꿈 얘기를 했더니 제대로 먹이지를 못해 애가 돌아버렸다며 통곡을 해댔다. 며칠 뒤 순친왕부(醇親王府)에서 유모를 구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기운이 없어서 다리를 휘청거리며 왕부를 찾아갔다. 보채기만 하던 황상(皇上)은 내가 안자 울음을 그쳤다. 생글거리더니 내 젖을 물고 잠들었다. 꿈 생각이 났다. 인연은 어쩔 수 없다.”

푸이는 리위친을 직접 공부시켰다. 붓글씨와 노래가 다였다. 이게 무슨 공부냐며 리위친이 화를 내자 얼굴을 붉히며 몽둥이를 들었다. “허구 많은 사진 중에서 내가 직접 너를 선택했다. 어제도 한 여자애가 왔지만 쫓아 버렸다. 내게 고마워 하며 충성하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 황태후에게도 네 사진을 보냈다.”

푸이는 여자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휘어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리 가버린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지켜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죽 적어 내밀며 서명을 요구했다. 여자가 도망가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고, 생각도 나와 같아야 한다. 동쪽으로 가라면 동쪽으로 가고, 남쪽으로 가라면 남쪽으로 가라. 서쪽이나 북쪽으로 가면 안된다. 부모 형제와 친척들은 만날 생각도 하지 마라.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황궁 내에서 지정된 곳만 다녀라. 외부 출입도 엄금한다. 노래하라면 노래하고, 춤 추라면 춤춰야 한다.”

이쯤 되면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리위친의 설명을 들은 창춘시 인민법원은 전범관리소를 찾아갔다. 981번을 달고 나타난 푸이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푸이가 수긍하자 법원은 리위친의 손을 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