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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 성을 청(程)씨라고 밝힌 노인이 창춘의 허름한 빵집에서 62년 전에 겪었던 일을 회상했다. “1950년 8월 3일 동틀 무렵, 중·소 국경마을 수이펀허(綏芬河)엔 전운이 감돌았다.
당시 나는 21세, 동북 인민정부 외사국 간사였다.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역에 도착해보니 새벽 4시였다. 사방에 매복을 끝내고 무장 병력을 철로 변에 배치한 후 전투 태세를 선포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밤안개가 짙었다.”
노인의 회고는 그칠 기색이 없었다. “6시 무렵, 소련 방향에서 울리는 기적 소리가 정적을 깼다. 육중한 열차가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자 다들 긴장했다. 객차 문이 열리고 무장한 소련 군인들이 먼저 내렸다. 잠시 후, 키가 1m70㎝ 남짓한 40여 세 정도의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색 양복에 검은 테 안경, 손에는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공포에 질린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한눈에 누구인지를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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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인민정부 측에 신병이 인도된 푸이 일행은 중국 열차로 갈아탔다. 푸이와 함께 송환된 공친왕(恭親王) 손자의 구술이 흥미롭다. “중국 기차에 올라탄 우리는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염라대왕의 심부름꾼이 주변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입이 얼어 붙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푸이는 사색이 돼 있었다. 자신이 1급 전범인 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형장으로 직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선포한다. 이제 너희들을 포로가 아니다. 전범죄로 모두 체포한다. 나는 저우언라이 총리의 지시에 의해 너희 일행을 조국으로 안내하러 나왔다. 우리 당의 정책과 인민정부를 믿어라. 학습에 매진해서 사상을 개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기 바란다.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를 불러라.” 전범 선언과 동시에 손발이 묶일 줄 알았던 푸이 일행은 반신반의했다. 의심이 많던 푸이는 말이 저렇지 그럴 리가 없다며 믿지 않았다.
선양(瀋陽)에 도착하자 인솔자가 푸이와 전 만주국 총리 장징후이(張景惠·장경혜)를 호명했다. “따라와라. 만날 사람이 있다.”
밖으로 나온 푸이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줄 알았다. 조카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희들까지 죽일 심산이구나. 우리 모두 조상을 만나러 가자”며 앞장섰다. 건물로 들어서자 큰 탁자에 과일·사탕·빵·담배 등이 놓여 있었다. 푸이는 “내 생각이 맞았다. 마지막 음식이니 실컷 먹자”며 닥치는 대로 입에 쑤셔 넣었다. 중국은 사형 집행 직전에 한바탕 먹이는 전통이 있었다. 키 크고 안경 낀 사람이 나타났다. 수행원이 가오강(高崗) 주석이라고 해도 푸이는 먹기를 그치지 않았다. 당시 가오강은 동북 인민정부 주석과 중공 동북국 서기, 동북군구 사령관을 겸한 동북의 최고 통치자였다.
가오강이 입을 열었다. “5년 만에 돌아왔으니 우선 쉬고 학습을 받도록 해라.” 푸이는 듣는 둥 마는 둥, 사과 씹는 소리만 요란했다. 가오강이 귀국 소감을 묻자 먹기를 그치고 쏘아 부쳤다. “소감은 무슨 놈에 소감. 이왕 갈 거, 먹을 만큼 먹었으니 빨리 가자. 형장에 가기 전에 판결서나 보자.”
갑자기 장내에 웃음이 터졌다. 가오강도 웃고 수행원들도 웃었다. 웃기를 그치자 가오강이 푸이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라. 두려워할 필요 없다. 일단 푸순에 가서 쉬도록 해라. 선양에는 적합한 장소가 없다.”
가오강은 푸이에게 황후 완룽(婉容·완용)의 소식도 전했다. “4년전 옌벤(延邊)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선족 부부가 정성을 다해 돌봤지만 전쟁 중이라 치료가 불가능했다. 유골을 찾으면 우리가 잘 보관했다가 돌려주마.”
푸순의 전범관리소에 수용되던 날, 푸이의 심정이 어땠을 지는 알 길이 없다. 푸순은 3백여 년 전, 푸이의 조상인 청 태조 누르하치가 처음 깃발을 날린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