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면 좋은 상식

문창극 강연 전문

친가유 2014. 6. 13. 22:06

문창극 강연 전문

 

 

 

[강연제목 : 기회의 나라를 만들어 주십시오 ]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왜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매일매일 계속해서 기도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기도한다.


우리는 왜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하는가. 이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 나라를 위해서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고 싶어 기도한다.


나라는 무엇인가. 비행기 좌석 클래스와 같은 것이다. 1등석 2등석 3등석이 다르듯이 각 나라가 처한 클래스에 따라 국민들의 처지가 좌우된다. 믿는 자라면 나라가 복 받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기도를 해야 한다.


왜 하나님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켜서 여기까지 왔을까.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에서 지금까지 지내온 상황으로 보면 대한민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런 것인가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은 과연 대한민국에 무슨 뜻을 갖고 있는가 저 나름대로 찾아보고자 이 자리에 섰다.


1890년. 선교사들이 처음 이 나라에 왔던 시기이다. 조선조 말기 고종 때이다. 1890년부터 지금까지 이 나라가 어떻게 전개되었느냐를 우리가 훑어보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된 나라인가. 고비마다 굽이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었다. 우리 민족에게 고난을 주신 것도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중요한 고비마다 길을 열어주셨다.


우리나라를 써야할 일이 있어서 열어주신 것이다. 대한민국은 굽이굽이마다 시련과 도전을 받았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기회로 작용해서 여기까지 걸어왔다.


조선시대의 상황에 대해서 1832년 서해 몽금포에 당도해서 목격한 독일기독교 선교사 퀴츨 라프의 증언 :


“조선 사람들은 불결과 빈곤으로 자기 생애를 보내야 하는 끔찍한 거처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의 피부는 때로 덮혀 있었다. 오랫동안 씻지 않아서 이 같은 해충이 득실댔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해충을 잡아 죽이는 짓을 주저하지 않았다. 살림 도구는 서툴게 빚어졌다. 진흙으로 빚어졌는데 상상할 수 없이 조잡했다.”


1874년 프랑스의 달레 신부의 증언 :


“창고의 저장은 장부 상에만 있다. 지방 병기고에는 쓸만한 탄약도 무기도 없다. 관리들이 다 팔아먹고 누더기 몇 조각과 고철 나부랭이를 대신 갖다놓았다. 아전과 수령은 그들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강탈한다. 백성은 하도 곤궁하여 서해안 사람은 밀수업자에게 어린 딸을 쌀한말에 팔고 있다. 길마다 송장이 널려있다.”


1890년 영국의 비솝 여사가 쓴 “조선나라와 그 이웃나라들”에서 발췌 :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찌나 더러운지 일본 사람들이 거주하는 부산의 동래를 가보니 동래 현은 그렇게 깨끗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이렇게 깨끗하지만 조선 사람들이 사는 부산진은 왜 이럴까. 서울도 마찬가지다. 냄새가 나고 다닐 수도 없을 정도였다. 영월에 가서 잠을 청했는데 빈대나 이 때문에 잠을 못잘 뿐더러 잠자리를 동네 수많은 사람들이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지켜볼 정도였다. 여행을 하다가 양평에 까지 당도해서 양평군의 사정을 알아보았는데 그 조그만 동네에 이방이 800명이나 있었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 사람들을 다 누가 먹여살릴까. 백성들이 먹여살린다. 이방들은 사람들의 집에 뭐가 얼마나 몇 개씩 있는지 다 알고 있다. 어떤 백성이 열심히 일해서 무언가 남아서 가재도구를 새로 마련하면, 이방이 그 백성을 불러서 무조건 곤장을 친다. 네 죄는 네가 알지 어서 네 죄를 고하라라고 말이다. 조선 사람들은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왜? 일을 해도 남는건 다 빼앗겨 버리니 말이다. 그런데 연해주에 살고 있는 조선 사람들을 가서 목도해보니 깜짝 놀랐다. 원시인 같은 삶을 사는 조선인과 달리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러시아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살고 훨씬 더 깨끗하게 살고 있었다. 나라가 잘못되어서 이런 것이다. 백성이 뭘 얻기만 하면 곤장을 쳐서 빼앗아버리는 나라에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상이 조선말의 상황이었다.


당시 윤치호가 일기를 쓴 자료가 있다. 20대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일기를 썼다. 윤치호는 일기를 죄다 영어로 썼다. 누군가 일기를 갖고 흠을 잡을까봐 그렇게 했다. 윤치호가 일기에서 조선말 당시의 고종과 민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다. 왕궁에는 점쟁이, 무당, 내시 같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다. 다음은 윤치호의 언급이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러일전쟁이 조선땅에서 일어났다. 제물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포탄이 날아다니는데 황제(고종)은 점쟁이 말을 듣고 궁궐 기둥 밑에 큰 솥을 묻는 짓을 하느라 바쁘다.”


이는 윤치호가 일기에 쓴 내용이다. 고종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무능하고 그렇게 나약하고 그렇게 타락한 사람이었단 얘기이다. 민비가 죽기 전, 윤치호는 민비에 대해서도 평을 했다.


“영리하고 이기적인 이 여인(민비)은 미신을 섬기는 것의 반만큼 백성을 섬겼다면 그녀의 왕실은 안전했을 것이다.”


민비라는 사람도 백성을 섬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민비와 고종이 거처했던 지금의 시청 부근 덕수궁과 경운궁 자리에는 전부 다 점쟁이와 무당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왕과 왕비 모두 나라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왕과 왕비, 세자만 안전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는 것이 민비의 자세였다. 민비가 죽고 나서 고종이나 민비를 대신한 엄비가 얼마나 나라에 대해서 무책임했는지...


“일본한테 나라를 팔아먹어도 좋다. 일본이 우리를 합병해도 좋다. 단, 이씨 왕조만 살려달라.”


이것이 1910년 한일합방 시 이완용이 들고 가서 일본과 협상했던 내용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 나라가 없어지는데,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지면 조선의 국왕이라는 거 조선의 대신들이라는 거 모두 없어지는데 그런 것을 모르고 일본한테 우리나라 조선을 너희에게 바칠텐데 이씨 왕조만 살려달라. 이씨 왕실만 살려달라. 그러면 너희에게 나라를 갖다바치겠다...


그렇게 우리가 무능했고, 백년전에 그런 나라였다. 이런 나라에 들어온 게 선교사를 통해서 우리 기독교가 들어온 것이다. 그 때 기독교가 선교사를 통해서 들어왔다. 이승만 박사의 전기를 읽어보면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이승만은 원래 과거를 볼려고 그랬지만 과거를 보지 않았다.


이승만은 어렸을 때 눈병이 났다. 당시 아무 것도 안보였었다. 부모는 무당을 불러서 굿을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부모가 수소문을 해보니 서양의 선교사 의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양반은 무슨 병이든 잘 고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서양 의사에게 어린 이승만을 데리고 갔다. 서양선교사(의사)가 약을 발라주고 집에 가 있어보라고 그랬다. 며칠 지났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린 이승만이 “어머니, 내 엄마가 보여요.” 라고 말했다. “네가 눈을 떳구나”하고서 어머니는 이승만을 데리고 선교사에게 갔다. 계란 한줄을 들고 찾아갔다. 어머니가 선교사에게 계란을 드리며 감사 인사를 드리자, 선교사가 “그 계란은 당신 아들 먹이세요. 당신 아들이 눈이 멀었던 건 영양부족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렇게 해서 선교사는 계란을 받지 않았다.


그 때 이승만은 깜짝 놀랐다. “야, 서양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선교사란 사람은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나는 과거를 봐서 썩어가는 나라를 고치려 했는데 지금 과거 볼 때가 아니구나. 선교사가 무엇이고 서양의 의술이 무엇일까.” 이승만의 머리는 완전히 180도 달라졌다. 그래서 과거를 때려치우고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들어가서 신학문을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스물세 살 때 이승만은 감옥에 들어갔다. 고종에 대한 반역죄로 들어갔다. 이승만은 1907년, 6년만에 감옥에서 나왔다. 그때 조선은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였고 조선은 완전히 일본한테 먹히게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1904년 당시 감옥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썼다. 백년 전, 스물아홉살 이승만이 쓴 독립정신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세계 문명국 사람들이 기독교를 사회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로 일반 백성들까지도 높은 도덕수준에 이른 것이다.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에서 일어나고 썩은 데서 싹을 띄우자고 노력하는데, 기독교를 근본으로 삼지 않고는 온 세계에 접할지라도 그 목적을 못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를 모든 일의 근원으로 삼아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어 나라를 한마음으로 받들어 우리나라를 영국이나 미국과 동등한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건국 사천이백삼십칠년 유월이십사일.”


이승만의 결론은 이 나라는 기독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 국가가 아니고서는 조선은 살아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승만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면... 왜 우리나라를 보호해주셨으면 일본한테서 합방을 당하지 않게 하시지 왜 하나님은 이 나라를 일본에게 당하게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다. 속으로 말이다.


하지만 서두에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조 오백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고난이 필요하다” 해서 하나님이 고난을 주신 거라고 생각한다. 그 고난 속에서 삼십육년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마치 광야의 사십년 생활을 하고서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듯이 삼십육년의 고난을 거치고 난 다음에 대한민국에게 독립을 허용하신 것이다.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지금 와서, “야, 과거 일제가 우리에게 뭐냐 우리가 참 못난 민족이다” 이럴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게 다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 피 속에서 하나의 고난으로 영글어서 지금 우리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후회할 필요도 없고 우린 그것을 애석하게, 지금 뭐 애석하긴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상심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가 들어왔지만 오백년간 내려왔던 조선의 못된 관습, 게으름 이런 거는 일제시대에도 여전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을 하나의 모토로 삼았다. 1930년, 40년대 찬송가에 “일하러 가세”라는 찬양이 있었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기독교가 뭘까. 기독교는 우리 조선 민족에게 “너희들 일해야 한다.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근면해야 한다.” 그것을 깨우쳐준 것이다. 일제시대 당시 스코필드 박사가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은 조선 민족에게 나라와 긴 손톱 두 개를 주시면서 (아마도 양반들이 청나라를 따라해서 손톱을 깎지 않았던 모양이다) 너희들이 선택해라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애닳게도 나라를 택하지 않고 긴 손톱을 선택했다.”


양반들이 얼마나 게으르고... 그때 양반들은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일하면 양반들은 수치라고 생각했다. 양반들은 긴 담뱃대에다가 담배 피고, 앉아서 독경, 독경이 아니고 강독 같을 것을 했다. 조선민족의 상징은 아까 말씀드렸지만 게으른 거였다. 그러한 게으른 것을 깨자고 한 것이 그 때 들어온 기독교였다.


돈 많은 사람들이 당시 일본에 유학을 많이 갔다. 돈많은 사람들, 양반들이 일본에 가서 일을 하느냐. 조선의 못된 관습 때문에 일을 안했다. 일은 안하고 그럼 뭘했을까. 조선 지식인 유학생이 어땠을까. 윤치호가 당시를 설명한 일기를 읽어보겠다.


“조선 유학생 90프로가 사회학, 철학, 정치학에 코를 묻고 있는데 그들의 게으른 혀를 굴리는 데는 사회주의가 이상적일 것이다.”


당시 지식인들은 일본에 유학 가서 공학, 의학을 한 것이 아니다. 비탄에 빠진 당시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런 게 필요한 게 아닐까. 과학을 안하고 사회학 정치학 등 혓바닥을 놀리는 학문에 임했던 게 당시 엘리트들의 생각이었다.


당시 윤보선은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윤보선 집은 안국동에 백칸짜리 집이 있던 부자집이었다. 한국의 부모에게 연락하면서 윤보선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한다.


“학비를 보내시오. 내가 문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소.”


윤보선이 부모에게 요청한 생활비는 800파운드. 아마 쌀이 백가마니 이상 들었을 것이다. 윤치호는 이를 두고 통탄한다. 그런 비싼 돈을 주고 영국 에딘버러에 가서 그런 공부를 한다고 말이다. 윤치호는 우리나라에 당장 필요한 건 나라를 부강시키고 국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윤치호는 이를 꾸짖는 편지를 썼다. 조선 유학생들은 일하기 싫어한다. 그리고 앉아서 순 말로만 하는 것을 좋아한다.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고, 이게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있었다고 말이다.


“조선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딱 맞는다. 공산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살기를 조장한다. 이것이 유교를 가진 조선과 공통점이다.”


그렇죠. 공산주의도 자기가 일하는 겁니까. 자기가 일 안하려는 것이다. 정부가 세금을 걷어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 놀자고 하는 것이 공산주의 아닌가.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자기 땀과 자기 노력으로 일해야 하는데, “야! 돈 번 사람들은 다 우리 거를 착취했다. 그러니까 저 사람 꺼를 뺏어서 먹자.”


심플하게 얘기하면 그거 아닐까. (윤치호는) 조선의 과거 조상들의 피에는 오히려 공산주의가 맞는다고 얘기했다.


“조금만 먹고 살만한 사람들에게 달라붙는 친인척들. 조선은 옛날부터 공산주의를 해왔다. 조선 버전의 볼세비즘(공산주의)는 강도 짓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이조 말기의 우리 민족들의 피에는 공짜로 놀고 먹는 게 아주 그냥 몸에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런 나라였다.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고. 그런데 그런 나라에 선교사들이 와서 변화를 주신 것이다. 국립민속관인가, 경복궁에 있는 사진전에 갔었다.


북간도에 명동이라는 곳이 있었고 거기 일백몇명이 처음 가서 정착했는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정착해서 일구어 나갔느냐에 대해 후손이 사진을 전부 다 발견해서 사진전을 연 것이다. 사진전을 가보니, 당시 북간도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깨끗하고 열심히 살았는지 감명스러웠다. 이렇게 게으른 나라의 피를 타고 났는데 선교사님들, 김약연 목사님이 가족을 5가구 120명을 끌고 가서 명동교회, 명동학교, 명동유년주일학교, 명신여학교를 만들고...


이가 득실거리고 냄새가 나던 조선이었는데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모른다.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에게는 세라복을 입히고 실험실에는 전부 다 가운을 입혀서 비커 등 실험기구가 가득차 있고 애들을 악대, 브라스밴드를 만들어서 제복을 입히고 등... 오백명이 다니는 교회를 만들었다. 거기서 그렇게 잘 살았다. 우리가 게으른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우리가 하나님 뜻에 맞게 살기로 작정하고 난 다음에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조선민족들에게 보여주었나 말씀을 드린다.


그렇게 해서 일제시대가 지났다. 그래서 우리에게 독립을 주셨다. 독립을 주셨으면 잘 살게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우리가 36년을,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했는데, 잘 살아야 되는데... 또 하나님은 시련을 주신 것이다.


분단이다. 분단. 남북분단을 만들게 하셨다. 지금 와서 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다. 그 당시, 아까 얘기했지만 조선 지식인들은 거의 다 공산주의 사상에 가까웠다. 만일 그 때 통일 한국을 주셨으면 한국은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다. 자동적으로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 당시 남한에 얼마나 많은 공산주의, 조선노동당이 있었습니까. 그 사람들이 나중에 다 여순반란 사건 같은 것을 일으켰는데 당시 우리 체질로 봤을 때 한국한테 온전한 독립을 주셨으면 우리는 공산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위에는 다 소련이고 그 옆에는 중공이고, 우리가 거기서 견뎌낼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를 분단시켰다. 우리를 분단시킨 이유가 뭐냐. 그때는 안타깝고 이게 뭐냐 도대체 우리는 독립을 얻었는데 독립도 못하지 않았냐 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너희들은 불쌍해서 독립은 시켜줬지만 앞으로도 너희들은 더 고난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아직도 너희들의 게으름과 죄는 깨끗하게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분단을 시킨 것이다. 분단을 시킨 것이 지금 와서는 오히려 우리한테... 분단이 됐기 때문에 한국이 이정도 살게 된 것이다.


만약에 한국이 공산화되었다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월남(베트남), 중국. 중국은 몇 년 사이에 잘 살게 되었지만. 지금의 북한. 그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남한이 그 당시 통일되었다면 지금의 북한이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