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체면으로 산다
한국인은 체면으로 산다
우리는 뉴저지에서 살때 집 뒷마당 끝에 채소밭을 일구며 살았다. 초봄에 막 솟아오르는 부드러운 부추를 따먹으면서 시작하는 채소농사는 5월 경에는 상추를 끝내주게 실컷 먹는다. 그리고도 남아서 남들에게 인심을 쓰며 나누어 준다. 작년에는 근대와 "칼라드 그린"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즐겨 먹는 무科(과)의 채소)를 많이 수확했었다. 어떤 때는 풋고추와 호박이 너무 많이 나와서 김치로 담갔다가 시어지면 돼지고기를 넣고 찌개로도 해먹는다.
이렇게 많이 열리는 호박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싶어도, 일부러 와서 가져가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엊그제 아침에는 두어 집을 찾아 한바퀴 돌면서 그 집들의 대문고리에다가 호박봉지들을 매달아 놨었었다. 아침 일찍이라 벨을 울리거나 문을 뚜두리지 않고 살짝놓고 돌아와야 했었다.
집사람은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돌아와서 전화로 그들에게 알렸는가를 내게 물었다. 그 집문깐에 그냥 놔두면 호박이 시들지 않겠느냐는 거다. 사실 나는 아침 8 시경 부터 호박 두어개를 들고 그런 호들갑을 떨고 싶지가 않었던 바였다.
내가 마침내 집사람의 압력에 굴복해서 그 분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중 한 집은 최근에 농장에서 산 옥수수가 너무 많아서 고민하던 차라면서, 이번 내 호박의 답례로 우리 집에 가져다 주겠다는 거다. 심심하던 차라 오시라고 해서, 그 다음날 그들과 마주앉게 되었다. 집사람은 모처럼의 손님이라서 일부러 소고기 국물까지 만들어 놓고 냉면을 준비하며 설쳤다.
그런데, 그 방문한 바깥양반이 식탁에 마주 앉자 마자 "자기네는 곧 일어서야 한다" 고 말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냐? 우리 집사람은 아침 내내 청소를 하며 이것저것 옮겨놓고 부산을 떨었는데, 손님이 집에 들어서자 마자 가야한다는 것이다.
내 집사람은 "아니 모처럼 오셨는데, 왜 금세 일어서신다고 그러세요. 냉면을 준비했으니 잡수시고 가세요." 그의 부인이 벌써 여러번 우리 집에 한번 놀러오고 싶다고 말해 왔었다. 그녀의 속사정도 모르고 그 바깥양반은 그런 소리를 했던거다. 우리는 방금 먹고 왔읍니다"라고... 곧 가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방금 먹고 왔다," ... 어디 갈데가 있다," 등등의 이유를 가만히 듣자하니, 아무리 내 아내가 정성껏 준비했다 하더라도 꼭 먹고 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이기적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 사람을 불러세웠다.
"여보! 이 분들이 지금 곧 어디로 가야한다지 않아! 남의 형편을 무시하고 자기 뜻만 고집하면 옳지 않어!" 당신이 준비하느라고 수고 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이렇게 말한 나는 “기왕에 상 앞에 앉으셨으니, 냉면 한그릇 좀 잡수시고 일어서도록 하시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웃었다. 그리고 나서 이런 얘기를 했다.
"어느 젊은 애인들이 식당에 마주앉아서 촛불까지 켜놓고 바야흐로 막 정겨운 식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읍니다. 그 때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말이, ' 우리 언제 또다시 만나게 될까' 하고 걱정되는 말을 했다고 합디다." 그 순간의 좋은 분위기에 감동되었던 모양인데, 그런 말이 나올 일이 아니지 않겠오? 이제 막 오셨으니, 오늘 일은 잊어버리시고, 지금의 이 시간을 즐기도록 하십시다.
우리 넷은 결국 냉면 한 그릇 씩을 맛이 있게 뚝딱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두어 시간 동안 이 얘기 저 경험담을 털어놓으면서 재미있게 우리들과 얘기의 꽃을 피웠다. 잘 익은 늙은 호박 몇개를 더 받아들고, 돌아서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결국 어디를 정말 가야할 입장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괜히 그런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에 집사람이 내게 어제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어제 그 바깥양반이 곧 가야한다고 했더니 당신이 나보고 너무 잡아놓지 말라고 했었지 않았오? 그래도 꼭 먹고가야 한다고 내가 주장했었는데, 당신은 그 분이 체면 때문에 그런 변명을 하는 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더군요. 그리고는 내게 이기적이라고 딴 소리를 합디다."
"곧 가야겠다는 그의 말"이 이런 체면문제 때문에 나왔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까지 몰랐었다
내가 하는 말이,
"우리 집에 오고 싶어하다가 그제 막 들어선 마당에, 곧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말이 안되지 않아? 상 앞에 앉자 마자 한다는 말이 그게 뭐요? 그 사람...,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면서 사람을 혼동시키더군.
"그게 한국사람들이 늘 하는 버릇인지 아직도 모른단 말이요? 그런걸 미리 알아차리는 것이 삶의 지혜란 거요. 그래야 사람사는 것이 수월해 진다는 말이요!"
세상을 쉽게 살려면 거짓말도 해야 하고, 또 그것을 곧 알아 차려야 하고... 그래야 사는 멋이 있다는 얘기다. 나로서는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들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집사람한테 "사물을 바로 보고 판단해야지", 그 사람이 체면 때문에 사양했다고 넘겨 짚으면 오히려 문제가 더 시끄러워 지는 것이 아니겠오? 더구나 당신은 자기의 주장을 그렇게 한다면 이기주의자가 된다는 말이오. 선입관으로 넘겨짚는 것을 어떻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봤다' 고 말 할 수가 있겠오.
내 아내가 지지않고, "사물을 바로 본다는 것이 바로 그 겸양의 뒤에 숨어있는 그 사람의 본 뜻을 알아차린다는 거요. 미안하니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나 , 그래도 체면 만은 최대한 유지하고나서 같이 즐기고 싶다... 그래서‘방금 먹었다, 어디 가야 한다라고 일단 둘러댔던 거요"
내가 다시 말하기를, " 바로 본다는 것은 있는 그 대로를 보는 것이지, 사양했던 뒷면의 어떤 것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오. 변명이 있으리라는 것은 당신의 짐작이 아니겠오. 그가 말한 대로 받아드리는 것이 본심을 바로 본다고 나는 봅니다. 내 아내의 해석이 그럴듯 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과연 그럴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더 살펴볼 성질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선불교 (Zen Buddism)에 관한 책들 중에 이런 말이 쓰여있다.
"어떤 큰 절에 고승이 계셨는데, 그 분이 승려들을 뫃아놓고 "부다"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중에 이런 질문을 회중에게 던졌다. "매미의 울음소리를 내게 가져오라"고.... 불가에서는 불경의 본 뜻을 깨닫게 하는 한 방법으로 공안(Koan 또는 화두)란 것을 이용한다고 한다.
매미의 소리는 들으면 되거늘, 어찌하여 물건 처럼 가져오라고 하는가? 이런 종류의 질문이 세상을 혼돈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된다. 공안에는 해답이 없다고 한다. 이 책에서도 매미의 질문에 어떤 답을 주지않고 끝내고 있다.
"소리는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란 논리"에 사람들의 생각이 매인다. 그런 연고로 매미의 우는 소리를 아름답게 듣지 못하고 만다고 볼 수있다. 말로만 사물을 이해하려면 우리들은 바른 認識(인식)을 할 수가 없다는 거다. 이런 생각의 장벽을 넘어서야 만이, 비로서 "부다의 진정한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고의 과제를 고승이 던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손님접대의 경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는 "가야할 입장"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집에 들어서자 마자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왔어야 하는가"라는 논리로 듣는이의 생각이 흐르게 된다. 손님접대를 준비해논 주인의 입장은 “이미 와서 서로 맞대고 앉았으니, 지금의 이 순간을 즐기자"라고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내어놓은 겸양의 말속에는 무슨 진실이 숨어있는가? 오랬만에 매미의 아름다운 소리로 서로 즐기자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네는 아주 바쁜 사람들인데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했다는 것을 내세우는가? 정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수고한 것을 보니, 차마 그냥 돌아서지 못했다고 해석해야 하는가 ?
내 집사람은 이것을 본심을 가린 겉치례로 본다는 거다. 이 손님들이 정작 매미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는 것일까? 체면을 매우 중요시 하는 한국사람들의 속성은 이처럼 난해하고 또 오해를 자주 불러 일으킨다. 대화의 구렁이가 돌담 속을 들락날락.... 까리까리하게 사는 것이 과연 우리들의 참 다운 멋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