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독립운동을 분열시켰나?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분열시켰나?
이승만에 대한 비판 중에 ‘이승만이 매우 독선적인 인물로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끊임없이 갈등을 조장하고 독립운동을 분열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 기간이나 대통령으로서 재임한 기간은 화합되거나 원만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일본과 싸우는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과 갈등하였을 뿐 아니라 미 국무성과도 대립했다. 또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도 좌우투쟁, 한민당(민주당)계와의 갈등, 미국 정부와의 치열한 기싸움 등 타협을 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승만은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분열을 조장한 독선과 갈등의 화신이었는가?
이승만에 관한 진실
이승만의 인생 역정을 보면 강한 자신감과 함께 만만치 않은 고집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단기간 내에 남다른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냈고 서양의 국제정치를 역사적, 법률적, 실무적으로 면밀히 이해하고 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한성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 고려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되었으며 독립운동 기간 혹은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 여러 번 암살, 테러 공격을 당했다. 이런 경험을 한 자수성가형 인물들은 대체로 독선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경향이 있다.
이승만은 확실히 자기주장이 뚜렷하였고 그 주장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래서 한국 독립운동에 자신을 헌신한 것이고 독립운동 방법 중에는 외교노선을 택하여 그 방향으로 평생 일관하였다. 그는 반공반소주의를 스스로 정립하고 반공 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그러한 과정에서 대체로 비타협적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공과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이승만만이 독선적이거나 갈등을 일으킨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놀라운 점은 그의 노선이 거의 대부분 옳았으며 그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이승만
이승만이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 간에 큰 갈등을 겪은 첫 번째 사건은 하와이에서 박용만과의 대립이었다. 박용만은 한성감옥의 동지였고 결의형제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이들이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은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항일 군사력을 양성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 한성감옥에서의 이승만(맨왼쪽)
박용만은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무장투쟁 이외 다른 방법도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은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서 가난한 교민들의 성금으로는 감당이 어려울 뿐더러 일본을 타격할 능력을 구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더구나 미국 내에서 조직적인 무장과 사적인 군사훈련은 불법행위였다. 이승만은 외교에 의한 독립과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현실적인 최선의 전략으로 생각했다.
일생의 동지였던 두 사람이 더욱 격돌하게 된 것은 국민회 자금사용 내역과 회장선출 문제 때문이었다. 박용만이 국민회 자금의 사용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승만이 이 자금의 유용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로 인해 1916년 10월에 국민군단은 사실상 폐쇄된다. 1918년 박용만은 하와이에 들어온 일본군함을 폭파하려 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국민군단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후 박용만은 중국과 하와이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지만 중국 텐진에서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을 받아 의열단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평소 박용만의 공격을 받았던) 상해임정의 김구는 박용만이 조선총독부에 매수된 밀정이라고 주장했으나 이승만은 그럴 리가 없다며 박용만을 옹호하고 의열단의 소행을 비난하였다.
돌아보면 박용만의 무력투쟁 노선은 현실성이 취약했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태평양을 건너 일본까지 갈 비행기 한 대, 배 한 척 살 수 없는 처지에 무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것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접근이었다. 이들이 몸담고 있던 미국 사회도 그러한 무력적 방법에 대해 전혀 동조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불명확한 회계로 인해 비판을 자초하는 우를 범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스스로 회계의 투명성을 확보하였으며 내핍생활을 통해 건실한 기풍을 보여주었다. 그를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각별히 신뢰하고 존경하였다고 한다.


>> 박용만
한편으로 미주 한인사회에서 이승만은 안창호와도 대립하였다. 박용만 세력이 약화된 이후 재미 교포사회는 이승만 지지파와 안창호 지지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승만과 안창호의 노선은 비슷한 데가 많았던바, 둘 다 비폭력과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지향했다. 그런데 이승만이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한 반면 안창호는 민족의 정신적 개조에 보다 방점을 두고 있었다. 이승만은 국제정치를 활용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뛰었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데 관심을 두었다. 이에 대해 안창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온 민족의 정신적 개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책임의식, 정직성, 무실역행 등은 안창호가 우리 민족에게 부족한 점이라고 판단한 부분이었고 이런 것들을 기른 후에야 진정한 독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승만은 안창호의 민족개조론이 조국 독립을 달성하기에 너무 우회적이고 한가한 접근이라고 보았다. 안창호는 교육을 토대로 하여 민족의 정신을 바로 세워야 독립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이승만은 그것만으로는 국가의 독립이 불가능하며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민족의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조국 독립이 선행되어 올바른 민족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실제로 안창호의 민족정신 개조론은 이광수의 친일로 이어졌으며 안창호는 만년에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분열을 개탄하면서 조국독립 운동보다는 집단촌(이상촌) 건설에 관심을 보였다.
물론 이승만과 안창호의 갈등이 조국 독립의 방법론 문제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 간의 갈등에는 무엇보다도 박용만이 끼어 있었다. 안창호가 창립한 대한인 국민회에서 안창호가 총장, 박용만이 부회장이었고 이승만은 교육부문을 맡고 있었는데, 안창호가 박용만의 전횡과 자금 유용 문제를 수수방관한데 대해 이승만은 상당한 불만을 품었다. 박용만이 물러난 후 이승만과 안창호 간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었고 이는 상해임정에서 두 사람이 만났을 때도 이어졌다. 상해임정 내에서 기호파(김구, 이승만)와 관서파(안창호) 간의 분열이 상당하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승만과 안창호 간의 협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주 한인사회에서 이승만파와 안창호파 간의 분열과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이들은 국민회의 자리와 이권 등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했다.
임정에서의 이승만
이승만과 여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 중 다른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재임할 때였다. 임정 내에는 여러 분파들이 생겨났는데, 친소관계와 같은 붕당적인 성격도 있었지만 이념 갈등 혹은 헤게모니 투쟁과도 관련이 있었다. 임정 내에는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기호파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관서파 간의 대립이 다소 심각하게 전개되었으며 나중까지 이러한 지역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독립투쟁의 방법을 놓고도 사분오열했다. 이승만은 외교를 통한 독립이라는 국제정치적 접근을 중시했고 안창호는 무실역행의 자강(민족개조)론을 제창하였으며 신채호와 같은 무정부주의자들과 김구 등 국내파들은 폭력투쟁과 테러를 실효적인 수단으로 보았다. 또 공산당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무력투쟁을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생각하였는데 그들은 소련정부와 코민테른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고 재정적 지원을 얻고자 서로 경쟁, 반목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의 외교노선은 초기에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는데 그러자 실망감이 누적되었고 이승만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었다. 1921년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하였는데 특별한 반향을 얻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임정내의 비판이 거셌는데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비난했다. 또 공산당 계열의 국무총리 이동휘는 처음부터 이승만의 외교노선을 비난했고 사사건건 대립해왔다.
이승만은 워싱턴 군축회의에도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을 각국 대표에 호소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반공적 이념을 정립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소련에 대한 의존성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그룹이 증가하여 이승만은 더욱 고립되고 있었다.
1925년 3월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 탄핵이유는 불명확하고 잡다하였는데 이승만이 상해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 상당 기간 대통령 자리를 비워놓은 것이 핵심적인 원인이 되었다. 하여간 이승만이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임정에서 이승만의 적들이 늘어났고 이승만에 대한 기대가 추락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임정의 분열이 이승만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원래 아무런 세력도 없이 상해로 왔고 탄핵 의결 이전에 이미 미국으로 돌아가 있었으며 임정의 분열은 탄핵 이후 극심해졌기 때문이다. 후임 임정 수반(국무령)들은 임기를 채우기는커녕 수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상해임정은 인적, 재정적 자원을 갖추고 있었지만 이승만이 물러난 후 임정은 사분오열하여 정치투쟁의 광풍 속으로 몰려 들어갔고 그 중심성과 영향력이 급격히 축소되었다. 임정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수십 명으로 급감해 있었다.
독립운동의 분열상
그러면 임정과는 별도로 중국 대륙에서 무장독립투쟁을 하던 조직들은 어떠하였는가. 아쉽게도 이들마저 서로간의 헤게모니 쟁투가 극심하여, 1921년 자유시(Svobodny) 참변을 겪으면서 거의 궤멸되어 버렸다. 이 사건은 그간 각기 움직이던 무장독립운동 조직을 한데 모아 하나의 지휘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각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이 자유시에 모여든 바, 이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임이 드러났다. 결국 통수권을 쟁취하려는 갈등이 급격히 전개되었고 그것은 각 부대 간 합종연횡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소련 적군(볼셰비키)의 지원을 받은 부대(자유대대)가 여타 부대(특히 사할린 의용군)를 몰살시키고 생포한 포로들을 중앙아시아로 보내 버렸는데 이를 자유시참변(사변)이라 한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소련의 적군이 한국의 무장독립운동 조직을 무차별 공격한 것은 일본과의 비밀 외교협정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장독립투쟁 조직들 간의 갈등 자체는 실제 사실이었다.)
이외에 중국 등에서 활약한 각종 무장독립단체와 상해 임정의 관계를 살펴보더라도 이들 사이가 상호 협력관계라기 보다는 경쟁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920년대 의열단과 상해임정은 여러 모로 경쟁적 상황에 있었다. 이에 비한다면 이승만과 김구는 지속적으로 협력하였고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서로 신뢰를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관계였다고 할 것이다. 해방 후에도 이들은 반탁운동 등 꾸준히 같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들도 최종적으로 국가를 건설하는 단계에서 의견을 달리하였고 대립관계로 전환되고 만다.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을 지나치게 이상시하고 그들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면 몇몇 사람이나 단체에 모든 잘못을 떠넘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보통의 인간이었다.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신념이 강하고 사회의식과 공명심이 높고 열혈기질을 특징적으로 가진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개인적인 신념과 자존심이 강하여 서로 갈등을 만들 소지가 크고 또 상황적 특성상 서로를 믿을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도 그러한 복합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승만은 김구 등 여타의 독립운동가들에 비하면 오히려 갈등을 적게 겪은 편이며 대단히 일관된 삶을 살았다. 이승만이 개인적 치부나 욕심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을 분열시켰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 신념의 인물이 조국의 독립을 되찾고 희망하는 나라를 세우려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신념과 의견의 대립을 겪었지만 그것은 대체로 불가피한 일이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갈등에서 그는 거의 대부분 바람직한 방향에 서 있었다.